[Leisure]엄홍길과 함께한 한라산 등반기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2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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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간쯤 오르자 저질체력 본색
엄 대장은 시야에서 서서히 사라지고…

기자는 12일 엄홍길 대장과 함께 한라산을 올랐다. 롯데호텔 제주가 주최한 ‘한라산 동행 패키지’ 참석차 제주에 온 그는 “산 정상에 오르면 정복감보다 경외감이 더 든다”고 말했다. 롯데호텔 제공
기자는 12일 엄홍길 대장과 함께 한라산을 올랐다. 롯데호텔 제주가 주최한 ‘한라산 동행 패키지’ 참석차 제주에 온 그는 “산 정상에 오르면 정복감보다 경외감이 더 든다”고 말했다. 롯데호텔 제공
12일 오전 10시 제주 한라산국립공원 탐방안내소. 불과 3일 전까지만 해도 한라산은 40cm가 넘는 폭설로 입산이 통제됐던 터였다. 눈 덮인 한라산 등산에 도전하는 일행은 기자를 포함해 70여 명. 대부분이 아마추어였지만 한 명만은 누구나가 아는 ‘프로 중의 프로’였다.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8000m급 16좌를 모두 오른 엄홍길 대장이 바로 그였다.

‘엄홍길 대장과 함께하는 한라산 동행 패키지.’

그는 롯데호텔 제주에서 주최한 여행이벤트에 참석하기 위해 이곳에 온 터였다. 기자는 엄 대장과 구면(舊面)이다. 대학 시절 ‘사회 리더를 만나 인터뷰를 해오라’는 과제를 하기 위해 도봉산을 함께 올랐었다. 말하자면 두 번째 동행 인터뷰인 셈이다.

10시 반경 복장 점검을 마친 뒤 탐방안내소(해발 980m)부터 윗새오름 휴게소(1700m)를 목표로 발걸음을 뗐다.

엄 대장은 제주도와 인연이 깊다. 한라산이 히말라야 원정을 위한 전지훈련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는 “세찬 바람에 눈도 많이 오면서 날씨마저 변덕스러운 히말라야는 한라산과 매우 흡사한 기후”라며 “현지로 떠나기 전 이곳에서 한 달씩 적응훈련을 했다”고 말했다.

그뿐 아니다. 해군특수전여단(UDT) 출신인 엄 대장은 30여 년 전 이곳에서 심해잠수, 한라산 주파 훈련을 했다. 그는 “제주도가 산악인이 되는 밑거름이었다”고 표현했다.

그는 1960년생이다. 올해 나이 쉰둘. 강철 체력을 자랑하는 타고난 산사나이도 나이를 속이지는 못하는 모양이었다. 가파른 경사가 이어지자 그의 이마에서 구슬 같은 땀이 흘러내렸다.

일행과 함께 산을 오르는 동안 엄 대장은 누구에게나 친절했지만 특히 어린이들에게는 몇 배나 친절한 모습을 보였다. 히말라야 어린이들을 접하면서 그는 어린이들에 대해 누구보다 더한 애틋함을 갖게 됐다. 그는 “네팔 등 히말라야 부근 국가 아이들이 배우지 못하고 먹지 못해 가난이 대물림되는 상황을 보면서 교육이 너무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언제부터인가 그에게는 히말라야 어린이들에게 교육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인생의 새로운 16좌”가 됐다. 그는 2010년부터 현지에 학교를 세우기 시작했다. 현재까지 3개를 완공했고 5년 안에 16개를 짓는 것이 목표다.

기자의 ‘저질 체력’은 불과 1시간이 지나자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조금씩 거리가 벌어지더니 어느새 엄 대장의 배낭만 겨우 보일 정도로 멀어져 있었다. 그를 다시 본 것은 오후 1시경. 목적지인 윗새오름 휴게소에서 컵라면을 먹고 있는 그의 옆에 앉았다.

어디서부터가 하늘이고 바다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푸른 바다가 보였다. 한라산을 정복한 것 같아 가슴이 벅찼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올랐을 때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그의 대답은 달랐다.

“오르면 오를수록 나를 받아준 산에 대한 경외감만 더 커지더군요.”

수많은 죽음의 고비를 넘긴 그에게 산은 생사여탈을 가진 절대자였다. 그는 1999년 풍요의 여신이라는 뜻을 지닌 ‘안나푸르나’(8091m)를 4전 5기 끝에 오른 이야기를 했다.

“네 번째 도전 때 암벽에서 떨어지는 현지 셰르파 한 명을 손으로 잡다 로프에 발이 채이면서 절벽으로 굴러 떨어졌습니다. 눈을 떠보니 눈에 파묻혀 있었는데 이곳이 이승인가 저승인가 헷갈릴 정도였어요.”

다행히 이승이었지만 그의 오른쪽 발목은 완전히 부서져 있었다. 뒤꿈치가 앞에 와 있었다. 그는 칼로 신발을 자르고 발목에 부목을 댄 뒤 2박 3일을 기어서 내려왔다. 헬리콥터로 후송된 그에게 현지의사는 “다시는 산을 못 탄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9개월 뒤 그는 다섯 번째 도전 만에 안나푸르나 정상에 올랐다.

오후 4시경 하산지인 영실탐방안내소에 다다랐다. 그와 마지막으로 일문일답을 주고받았다.

“산이 왜 좋으신가요?”

“내가 산이니까요.”

제주=송인광 기자 ligh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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