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석 7단(왼쪽)이 6월 말 제16회 GS칼텍스배 본선 8강전에서 천적 박정환 9단과 만났다. 김 7단은 이 바둑에서 불계패했다. 한국기원 제공
박정환 9단(18)과 김지석 7단(22)은 천재형 기사. 어려서부터 기재를 보여온 박정환은 17세 11개월로 국내 최연소로 9단을 따낸 차세대 대표주자. 김지석도 이창호에 이어 두 번째로 조훈현 9단의 내제자가 될 것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천재소리를 듣던 기사. 박 9단과 김 7단은 각각 한국바둑리그 킥스와 영남일보의 주장으로 랭킹 2위, 6위인 실력파.
그런데 김 7단은 유독 박 9단만 만나면 작아진다. 지난 주초 ‘2011 스포츠어코드’ 국내선발전 결선에서 둘이 만났다. 김 7단은 이날 바둑에서 불계패했다. 2008년 이후 비공식기전을 포함해 9연패. 역대 전적도 2승 11패로 열세. 주변에서는 김 7단이 2007년 엠게임마스터스챔피언십 결승전에서 네 살 아래의 박 9단에게 패한 뒤 마음의 내상을 이겨내지 못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바둑계에는 이처럼 실력으로 보면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데 특정 상대에게 맥없이 지고, 판 맛을 보지 못하는 천적(天敵)관계의 기사들이 있다.
랭킹 8위 박영훈 9단(26)과 랭킹 12위 강유택 4단(20)도 천적관계. ‘소 신산(神算)’으로 불리는 박영훈은 후지쓰배 우승을 비롯해 명인전, GS칼텍스배, 천원전 등 각종 기전에서 우승한 강자이지만 아직 우승경력이 없는 강 4단에게는 역대 전적 5전 전패를 기록하고 있다.
국내 랭킹 1위에 올해 세계대회 2관왕 이세돌 9단(29)은 백홍석 8단(25)에게 약한 모습을 보인다. 역대 전적은 3승 5패로 비슷하지만 2007년 이후 4연패. 두 사람의 기풍이 모두 싸움바둑인데, 백 8단이 주눅 들지 않고 맞받아쳐 이 9단이 무너질 때가 많다는 것.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절친 사이인 한국기원 사무총장인 양재호 9단(48)과 프로기사회장 최규병 9단(48)의 관계도 재미있다. 동갑내기 라이벌인 두 기사는 1990년대에 치열하게 싸웠다. 양 9단은 1991년부터 95년까지 최 9단에게 11연패했다. 역대 전적은 10승 20패로 열세.
천적관계는 국내에 국한되지 않는다. 천야오예 9단(22)과 최철한 9단(26)의 관계도 그렇다. 지난주 중국에서 열린 제15회 박카스배 한중천원전 3번기에서 천 9단이 2승으로 우승했다. 최 9단은 2007년부터 내리 5연패했다. 역대 전적도 1승 6패. 천 9단은 박정환에게도 5승 2패로 강하다.
그러나 자연계 천적관계와는 달리 바둑계에서 영원한 천적관계는 없다. 이세돌은 한국 기사에게 유독 강한 셰허 7단(27·중국)에게 1승 4패로 열세였지만 춘란배 결승전에서 2-1로 눌러 우승하면서 징크스를 극복했다. 역대 전적 3승 5패로 비슷해졌다. 이창호 9단(36)의 한때 천적은 홍성지 8단(24)으로 4연패하기도 했으나 지난해부터 이창호가 3승 1패로 승률이 더 좋다.
한국기원 기전팀의 정동환 차장은 “바둑을 두다보면 심리적 요인 때문에 특정 상대에게 지는 사례가 종종 있다”면서 “그러나 일류 기사들은 마음의 부담을 곧 극복해 간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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