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한수산의 동토의 민들레, 사할린 동포]<3>한인1세들 고난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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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8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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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귀국’한 조국은 차갑기만… 피눈물 흘리며 다시 동토로

김홍지 사할린한인연합회 회장이 적막한 코르사코프 항구를 내려다보며 상념에 젖어 있다. 사할린 남쪽에 있는 이 항구는 일제에 강제징용돼 사할린으로 끌려온 한인들이 광복 후 귀국선을 타기 위해 몰려갔던 곳이다. 끝내 오지 않는 귀국선을 기다리던 이들 일부는 추위와 외로움에 미쳐서 죽어갔다. 한수산 씨 제공
김홍지 사할린한인연합회 회장이 적막한 코르사코프 항구를 내려다보며 상념에 젖어 있다. 사할린 남쪽에 있는 이 항구는 일제에 강제징용돼 사할린으로 끌려온 한인들이 광복 후 귀국선을 타기 위해 몰려갔던 곳이다. 끝내 오지 않는 귀국선을 기다리던 이들 일부는 추위와 외로움에 미쳐서 죽어갔다. 한수산 씨 제공
《 일제에 의해 사할린으로 끌려간 후 혹독한 강제노역에 시달리다 광복을 맞았으나 고국으로 돌아오지도 못한 채 그 땅에 버려져야 했던 강제징용자들. 동토의 땅 사할린의 슬픈 역사를 고스란히 몸으로 살아야 했던 그들도 세월과 함께 하나 둘 고난의 생애를 마감하고 있다. 한국으로의 ‘영주귀국’ 사업이 진행되는 가운데 후손들은 러시아인으로 동화를 거듭하며 사할린의 오늘을 살아간다. 》
박수남 씨는 3개월 이상 국외에 있을 수 없다는 규정을 모르고 이를 어기는 바람에 다시 사할린으로 쫓기듯 돌아왔다.
박수남 씨는 3개월 이상 국외에 있을 수 없다는 규정을 모르고 이를 어기는 바람에 다시 사할린으로 쫓기듯 돌아왔다.
박수남 씨(91), 전남 고흥 출신. 1943년 11월 22세에 징용을 당해 사할린까지 끌려왔다. 질곡의 한국현대사와 함께했던 한 세기 가까운 생애를 그는 연도와 날짜까지 세세히 기억하며 들려주었다.

며칠 후면 ‘일본으로 돈 벌러 가기로’ 하고 누나 집에 가 있던 그에게 ‘빨간 딱지(징용통지서)’가 나온다. 여수항을 출발한 그의 삶은 홋카이도를 거쳐 사할린의 탄광으로 내던져진다. “사할린의 쿠시나이에 도착하니 째진 거(발가락이 갈라진 일본 작업화 지카다비) 하나씩 주데요. 그걸 신고 눈 내린 바닷가를 백 리는 걸었는데, 함바 주인이 와서 국수 한 그릇 먹이고 데리고 가데요.” 그렇게 오다스 탄광의 광원이 되었다.

1944년 조업 중지된 탄광에서 차에 실려 비행장 건설현장으로, 다시 코르사코프 항구 부근으로 끌려가 방공호를 파다가 광복을 맞는다. 고국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면서 바닷가로 나가 고기를 잡아 팔며 무국적자로 살아가던 그에게 운명처럼 한 남자가 찾아온다.

‘농편(농사짓는 데)으로 가자’는 그를 따라 브이코프 탄광지대 인근으로 와서 1년 남짓, 믿고 따랐던 그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 청년 박수남은 ‘꽃부리 영(英)자 쓰는 열다섯 살의 그 집 큰딸’ 영자와 결혼하면서 졸지에 어린 처남들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된다. 감자, 당근 농사를 지으며 힘들게 살았다. 나중에는 ‘장기근속으로 노력영웅 훈장도 받으며’ 철근콘크리트 공장에서 일했다.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그동안 고향으로 수없이 편지를 보냈으나 소식이 없었다(1976년에 처음으로 사진과 편지를 받았다는 말을 훗날 동생에게서 들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온 이 편지 때문에 한국의 가족들은 경찰서에 불려 다니며, 감시를 받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리고 그의 생애가 또 한 번 요동친다. 2000년 2월 23일, 여생을 한국에서 보내기 위해 그는 아내와 함께 영주귀국했다. 뒤따라 의사였던 처남도 한국 모 병원에 스카우트되었다며 서울에 도착했지만 공항에 나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취업사기였다. 수술실의 마취기술자였던 딸은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페레스트로이카(개혁)를 추진하는 와중에 직장을 잃자 ‘해 먹을 게 없어’ 서울로 온다. 월 100만 원을 받기로 하고 서울 명동의 식당에 취업했지만 그 딸마저 보름 만에 ‘나가려면 다른 사람을 구해 놓고 나가라’는 냉대 속에 겨우 15만 원을 받고 러시아로 돌아와야 했다.

조국과의 악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아내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다. 병명도 모른 채 한국의 병원을 들락거리다가 다시 찾은 사할린에서 ‘1년이나 늦었다’는 병원 판정과 함께 손도 못 써보고 아내는 세상을 떠난다. 아내의 병수발과 장례를 치르고 한국으로 돌아갔지만, 그를 기다린 것은 경기 안산시의 임대아파트 퇴거와 기초생활수급자 자격 박탈이라는 통보였다(영주귀국자는 3개월 이상 국외에 나가 있을 수 없다는 규정을 몰랐던 것이다). 차디찼던 조국의 기억을 뒤로하고 다시 사할린으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2005년 5월이었다.

비극 속에 꿈틀거리는 민족사의 강줄기 위를 풀잎처럼 떠내려갈 수밖에 없었던 작고 무력했던 한 개인의 생애, 이런 삶도 있었다니…. 한 시간 넘게 차를 달려 브이코프 탄광지대 인근으로 그를 찾아갔다. 포장 공사를 하느라 흙먼지가 구름처럼 솟아오르는 길가, 조그만 버스정류장에 박 씨가 나와 있었다. 그 더운 날씨에도 양복을 입은 노인은 꼿꼿한 모습이었다.

손을 흔들며 반갑게 차에 오르자마자 노인이 내민 것은 녹슨 깡통에 비닐을 깔고 곱게 담은 딸기였다. 자신을 만나기 위해 찾아오는 손님을 위해 손수 텃밭에서 기른 딸기를 두어 움큼 따서 씻어가지고 나온 것이다. 91세 할아버지가 기른 딸기를 묵묵히 베어 물며 생각했다. 정말 이분에게 한국은 무엇일까. 조국에, 시대에, 이념에 할퀴고 찢긴 한평생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그를 비켜가기라도 한 듯이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노인은 정갈했다.

그의 우리말은 90년의 세월만큼이나 멀리 있었다. ‘한방짜리에서 사는 게 얼마나 바빠?(방 한 칸에서 사는데 얼마나 고생인가)’ ‘동삼에 먹을 거 다 절구고 말리고 단도리해야 해(한겨울에 먹을 것을 다 절이고 말리고 챙겨야 해).’ 그는 힘들다를 ‘바쁘다’라고 했고, 직장을 ‘일간’이라고 했다.

마지막 날, 사할린 남쪽 코르사코프 항구를 찾아갔다. 닥터 지바고가 걸어 나올 것만 같은 자작나무 숲이 이어지는 길을 김홍지 사할린한인연합회 회장이 동행했다. 귀국선을 타기 위해 한국인들이 몰려들었던 그 항구였다.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망향의 언덕’에는 이곳 액화천연가스(LNG) 공장 건설에 참여했던 대우건설이 성금을 모아 세운 한인 징용희생자 위령탑이 은빛으로 빛나며 푸른 하늘로 치솟아 있었다.

역사의 비극을 묻은 채 세월은 흘러갔다. 오늘 바다는 파도조차 없고, 코르사코프 항구에 정박한 배들의 침묵뿐, 기념탑 건너 아파트 앞에서 유모차를 밀고 가는 러시아 여인의 어깨 위로 7월의 햇살이 들끓고 있었다.

‘내가 아는 모든 것은, 오직 그것을 사랑했기 때문에 안다(everything that I know … I know only because I love)’라고 러시아의 작가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에 썼다. 나 또한 사할린에 와서야 사할린 한인들이 품고 살아가는 비극의 진실을 알게 되었다.

‘용서하라, 그러나 잊어서는 안 된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것들을 우리는 너무 많이 잊고 있다. 사할린 동포의 고난을 후세에 전하는 기념관조차 없지 않은가. 징용 당사자들이 세상을 떠남으로써 함께 사라져 버릴 것은 고난의 기억만이 아니다. 서둘러 자료의 멸실을 막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그 통한의 시대를 증언할 것인가.

역사적 책무를 생각할 때, 사할린 동포를 위한 현실적 지원 조치도 서둘러야 한다. 지난 2년 동안 4명의 국회의원이 사할린 동포들을 지원하기 위한 4개의 특별법안을 발의했지만 여전히 국회에 계류 중이다. 조속한 법안 통과는 그동안 국가가 방기해 온 피해국민에게 바치는 최소한의 예우가 될 것이다.

사할린을 떠나던 날, 활주로에서 대기 중인 비행기 창밖으로 노랗게 흔들리는 꽃들이 보였다. 지금도 사할린 공동묘지의 풀을 베며 나아가고 있을 조사원들을 생각했다. 더 늦기 전에 우리 정부가 한발 앞서 사할린 동포들의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때가 아닌가. 한인 공동묘지 전수조사가 갖는 의미의 중요성도 여기에 있으리라.
▼ 한국정부 ‘2, 3세 문화 지원’ 절실 ▼

코르사코프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의 한인 징용희생자 위령탑.
코르사코프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의 한인 징용희생자 위령탑.
현재 사할린에는 한인동포 3만여 명이 살고 있다. 사할린이산가족협회의 2010년 자료에 따르면 1945년 8월 이전 출생자로 현재 남사할린 지역에 살고 있는 한인은 631명이다.

사할린 동포들의 호소는 △희망자의 한국 영주귀국 △사할린 현지 정착 지원 △강제동원 피해 보상 및 이중징용 피해자의 생사 확인과 피해보상 △강제노역 당시의 저축금 등에 대한 일본 정부의 배상으로 요약된다.

이들은 크게 한국으로 영주귀국해 안산 고향마을 수준의 시설에 살기를 희망하는 사람과 이미 사할린에 정착한 자녀들과 헤어지기를 꺼려 귀국을 포기하고 한국이나 일본 정부에서 매월 일정 액수의 보상금 또는 생활보조비를 받기를 원하는 사람으로 구분된다.

2000년 영주귀국이 시작된 이래 2010년 3월까지 국내 19개 지역으로 사할린 한인 3762명이 영주귀국했다. 현재 전국의 20개 아파트에서 1566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일본은 한인 영주귀국사업에 지금까지 약 700억 원을 지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일 양국 적십자사를 주체로 하는 이 사업은 사할린 동포의 영주귀국, 일시 모국 방문, 영주귀국자 역방문 등을 전적으로 일본 정부의 재정에 의존해 왔다. 올해 6월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의 사할린동포 지원 관련 법안 공청회 자료집에 따르면 2011년도 일본의 관련 지원예산은 21억6100만 원이다.

그러나 이같이 일본이 견인하는 추진이 아니라 우리 정부가 주도하는 체제로 전환하는 것이 절실하다. 사할린 동포의 영주귀국이 러시아로서는 국적 이탈이므로 외교 마찰이 일 가능성이 있다거나 다른 나라 동포와의 형평성 문제를 운운하는 발상도 문제 해결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모스크바의 대학에 유학한 후 유즈노사할린스크 시 제1부시장과 사할린 주 건설국장을 지낸 한인 2세 김홍지 회장(사할린한인연합회)이 보여주듯 한인들은 높은 교육열에 힘입어 사할린 지도층 곳곳에 진출해 있다. 그러나 러시아인으로의 동화를 거듭해 한인 2세, 3세에 대한 문화적 지원이 절실하다. 2005년 일본이 6억 엔을 지원해 건설된 ‘사할린한인문화센터’조차 문화공간으로서가 아니라 식당 등 수익사업이 우선시되는 실정으로 현재 사할린은 한국문화의 불모지에 가깝기 때문이다.

한수산 작가·세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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