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성 전문기자의&joy]‘워낭소리’ 할배는 그날도 누렁이와 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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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5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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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 외씨버선길-봉화 사람들

소의 커다란 눈은 무언가 말하고 있는 듯한데
나에겐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없다.
소가 가진 말은 다 눈에 들어있는 것 같다.

말은 눈물처럼 떨어질 듯 그렁그렁 달려있는데
몸 밖으로 나오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마음이 한 움큼씩 뽑혀 나오도록 울어보지만
말은 눈 속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수천만 년 말을 가두어 두고
그저 끔벅거리고만 있는
오, 저렇게도 순하고 동그란 감옥이여.

어찌해 볼 도리가 없어서
소는 여러 번 씹었던 풀줄기를 배에서 꺼내어
다시 씹어 짓이기고 삼켰다간 또 꺼내어 짓이긴다.

―김기택의 ‘소’

경북 봉화군 춘양면 서벽3리의 사과나무꽃길. 날씨가 서늘해 이제야 하얀 꽃이 피었다가 지고 있다. 저 멀리 뒤쪽 엔 시루봉이 아득하다. 사과밭은 춘양목으로 이름 난 금강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엄마와 딸이 손잡고 도란도란 걷는 길. 아빠와 아들이 인생을 이야기하며 걷는 길. 동무들과 어깨동무하고 콧노래 부르며 걷는 길. 봉화 외씨버선길은 보일 듯 말듯 가르마 같은 산길이다. 봉화=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경북 봉화군 춘양면 서벽3리의 사과나무꽃길. 날씨가 서늘해 이제야 하얀 꽃이 피었다가 지고 있다. 저 멀리 뒤쪽 엔 시루봉이 아득하다. 사과밭은 춘양목으로 이름 난 금강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엄마와 딸이 손잡고 도란도란 걷는 길. 아빠와 아들이 인생을 이야기하며 걷는 길. 동무들과 어깨동무하고 콧노래 부르며 걷는 길. 봉화 외씨버선길은 보일 듯 말듯 가르마 같은 산길이다. 봉화=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영화 ‘워낭소리’의 최원균 노인과 새로운 일소 일곱 살 누렁이. 최 노인은 요즘도 해뜨면 달구지를 타고 논밭에 나갔다가 해지면 다시 달구지에 몸을 싣고 집으로 돌아온다. 영화에 나왔던 누렁이(1967∼2008)는 사람으로 치면 120세가 넘는다.
영화 ‘워낭소리’의 최원균 노인과 새로운 일소 일곱 살 누렁이. 최 노인은 요즘도 해뜨면 달구지를 타고 논밭에 나갔다가 해지면 다시 달구지에 몸을 싣고 집으로 돌아온다. 영화에 나왔던 누렁이(1967∼2008)는 사람으로 치면 120세가 넘는다.
영화 ‘워낭소리’의 경북 봉화 최원균 할아버지(83)는 어김없이 들에 있었다. 제법 늠름해진 젊은 누렁소가 그 옆을 지키고 있었다. 쇠귀엔 바코드(소의 주민증)가 꽂혀 있었다. 올해 나이 일곱 살. 2006년 가을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사온 일소였다. 죽은 누렁이 곁에서 2년 가까이 일을 배웠다. 배가 남산만 했다. 연방 더운 콧김을 내뿜었다.

“달구지는 잘 끄는데 논일 할 땐 자꼬 내뺀다 아입니꺼. 훗달(6월) 또 새끼 날 끼라예. 사방이 고추밭인데….”

이번이 세 번째 출산. 최 노인은 태어날 송아지가 고추밭을 망칠까 걱정했다. 그는 귀가 어두웠다. 외치듯 크게 말해야 겨우 몇 마디 알아들었다. 서울말씨에도 영 낯설어했다. 최 노인은 논둑머리 땅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낫으로 나뭇가지 땔감을 다듬었다. 바로 그 옆이 죽은 누렁이의 무덤이다. 굴착기를 불러 장사를 치렀다. 묘비엔 ‘누렁이 1967∼2008. 평생 땅을 지키며 살아온 농부 최 노인이 30년을 부려온 소.…누렁이 여기에 잠들다’라고 적혀 있다.

“하모, 인자 할 수 없는 기라요. 내가 구십 다 돼 가는데…. 죽어 뿔먼 편한데…. 나 또래는 다 가고 없어요. 노변에서 만나 미안하오. 집에서 만났으면 커피라도 대접할 낀데….”

최 노인은 따뜻했다. 평생 소처럼 일했다. 요즘도 눈뜨면 들에 나가고, 해지면 돌아온다. 자가용은 예나 지금이나 누렁이가 끄는 달구지다. 다리가 불편해 달구지를 타야 논밭에 갈 수 있다. 지팡이를 짚어도 위태위태하다. 왼쪽 다리가 쇠꼬챙이처럼 가늘다. 젊은 시절 ‘사람 침이 아닌 쇠침’을 잘못 맞아 그리됐다. 그 굵은 침이 그만 인대를 건드린 것이다.

점심은 할머니 이삼순 씨(80)가 검은 봉지에 싸준 것이 전부다. 빵 하나, 검은깨 두유 2통, 부추무침, 양파튀김. 돼지고기는 먹지만 쇠고기는 입에 대본 적 없다. 가끔 마른 멸치나 마른 미역을 기름소금에 찍어 먹기도 한다. 할머니 이 씨도 온몸이 아파 집안 신세다. 열여섯 나이에 가마를 6시간이나 타고 시집왔다. 그렇게 최 노인과 9남매를 탈 없이 키워냈다.

달구지를 탄 최원균 노인의 조형물. 경북 봉화군 상운면 하눌리 최 노인집 앞에 있다
달구지를 탄 최원균 노인의 조형물. 경북 봉화군 상운면 하눌리 최 노인집 앞에 있다
봉화 외씨버선길이 21일 열렸다. ‘외씨버선’은 조지훈 시인의 시 ‘승무’에서 따온 것이다. ‘보일 듯 말 듯’ 가르마 같은 산길을 뜻한다. 봉화 춘양면사무소에서 춘양목체험관까지 17.6km 호젓한 길이다. 소달구지 둑길이다. 콧노래 부르며 가는 과수원길이다. 춘양 5일장(4, 9일)엔 무공해 산나물이 지천이다. 시장 바닥엔 쪼글쪼글 할머니들이 산나물을 내놓고 앉아있다. 문수산 발치 사과밭엔 하얀 꽃이 막 지고 있다.

길목엔 영남 양반가의 ㅁ자 한옥이 눈에 띈다. 안뜰에 모란꽃이 우아하다. 만산고택은 춘양목으로 지은 99칸 집이다. 서실 별당 사랑채 안채 하나같이 현판이 걸려 있다. 모두가 명필이다. 대원군, 오세창, 영친왕, 김규진, 권동수 등 조선의 내로라하는 글씨들이다. 66칸 한옥 권 진사댁 뒤란은 우렁우렁한 금강소나무 숲이다. 한두 시간 산책코스로 안성맞춤이다.

봉화는 83%가 산이다. 사방이 산 첩첩이다. 북쪽은 강원 태백산 선달산이 가로막고 있다. 기온이 낮아 이제야 라일락꽃이 핀다. 산나물도 다른 곳보다 2주쯤 늦다.

외씨버선길 시작점 춘양은 봉화에서도 외진 곳이다. 하지만 알고 보면 기름진 땅이다. 울고 들어갔다가 웃고 나온다. ‘억지 춘양’이 ‘덩실 춘양’으로 한순간에 바뀐다. 서헌수 춘양면 의양2리 이장(54)은 “큰 욕심 내지 않고 살면 천국이 따로 없다. 오히려 자꾸 사람들이 손을 대서 바꾸려고 하는 게 걱정이다. 그림 같은 동네를 길 넓힌다고 여기저기 파헤쳐서 되겠는가. 자연은 한번 망치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춘양목으로 지은 99칸 영남양반 ㅁ자 한옥 만산고택. 선비의 멋과 단아함이 우러난다
춘양목으로 지은 99칸 영남양반 ㅁ자 한옥 만산고택. 선비의 멋과 단아함이 우러난다
봉화읍내는 시골마을이나 마찬가지다. 밤엔 개구리 울음소리가 가득하다. 최 노인 집은 봉화읍내서 가까운 상운면 하눌리. 최 노인 몸피는 마른 검불이다. 훅 불면 날아갈 듯하다. 쪼그라질 대로 쪼그라졌다. 구겨진 철사줄 같다. 큰아들 최영두 씨(57·경북인터넷고 교사)는 가슴이 아프다. 관광버스가 시도 때도 없이 밀어닥치는 것도 매우 불편하다. “평생 일밖에 안 하신 어른이다. 평소 사시는 대로 기록테이프라도 하나 남았으면 하고 촬영을 허락한 건데….”

논 들머리에 앉은 최 노인이 자꾸만 큰길 쪽을 내다본다. 담배를 한번 길게 빨아들이며 혼잣소리를 한다. “낼 모 심군다꼬 모판이 이따가 올낀데….” 300평쯤이나 될까. 논엔 물이 벙벙하다. 누렁이와 함께 말끔히 써레질을 마쳤다. 모 심을 준비가 다 끝난 것이다. 경북 영주에 사는 큰아들 영두 씨도 수업이 끝나면 부리나케 달려올 것이다.

최 노인의 얼굴은 햇볕에 구워진 옹기그릇 같다. 눈은 논물처럼 짓무르고 흐릿하다. 하지만 담담하다. 갓난 송아지의 눈처럼 무심하다. 논물엔 푸른 하늘이 가득하다. 구름이 잠깐 머물렀다가 사라진다. 누렁이의 둥근 눈망울에도 푸른 하늘이 덩그마니 앉아있다. 끔벅거릴 때마다 푸른 물이 그렁그렁하다. “뻐꾹! 뻐∼뻐꾹!” 먼 산 뻐꾸기 울음소리가 구슬프다.

‘물먹는 소 목덜미에/할머니 손이 얹혀졌다./이 하루도/함께 지났다고./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서로 적막하다고.’

―김종삼의 ‘묵화·墨畵’
▼ ‘억지 춘양’인가 ‘억지춘향’인가 ▼

경북 봉화군 춘양목 군락지 외씨버선 숲길. 춘양은 ‘하늘도 3평,땅도 3평, 꽃밭도 3평’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외진 곳이다.
경북 봉화군 춘양목 군락지 외씨버선 숲길. 춘양은 ‘하늘도 3평,땅도 3평, 꽃밭도 3평’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외진 곳이다.
‘억지 춘양’인가 ‘억지 춘향’인가

경북 봉화군 춘양(春陽)은 골이 깊고 외지다. ‘하늘도 3평, 땅도 3평, 꽃밭도 3평’이라던가. 처음 이곳에 시집온 처자들 마음도 아득했을 것이다.

‘왔네 왔네 나 여기 왔네/억지 춘양 나 여기 왔네/햇밥 고기 배부르게 먹고/떠나려니 생각나네/햇밥 고기 생각나네/울고 왔던 억지 춘양/떠나려니 생각나네.’

봉화 사람들은 ‘억지 춘향’이란 말은 ‘택도 없다’고 목청을 높인다. 옛날 이 지방 노래가사에도 ‘억지 춘양’이라고 분명히 나와 있다는 것이다. 또 있다. 산업철도 영동선을 놓을 때 유래됐다는 설이다. 영동선은 경북 영주에서 강원 강릉까지 193.6km에 이르는 철도다.

1955년 당시 춘양 출신 자유당 실세가 억지로 철도 노선을 바꿔 계획에 없던 춘양역이 생겼다는 것이다. 실제 지도상으로 봐도 춘양역은 어색하다. 춘양역은 법전역과 녹동역 사이에 한쪽으로 한참 삐져나와 있다. 한눈에 봐도 법전에서 곧바로 녹동으로 가는 게 자연스러운 직선코스이다.

행정구역으로도 법전역과 녹동역은 같은 면(面)에 있다. 굳이 법전면 옆의 춘양면 쪽으로 혹처럼 빙 둘러 돌아갈 이유가 없다. 정치 실세의 ‘억지 춘양’인 것이다. 춘양역은 법전역과 5.2km, 녹동역과 4.8km 거리에 있다.

춘양목(春陽木)은 춘양에서 자라는 금강소나무를 말한다. 유명한 만큼 가짜도 많을 수밖에 없었다. 너도 나도 보통 소나무를 ‘춘양목’이라고 우겼다. ‘억지 춘양’ 유래의 또 다른 설이다.

‘억지 춘향’은 변 사또가 춘향이에게 ‘억지로 수청을 들라’며 윽박지르는 데서 유래됐을 것이다. 아니면 ‘억지 춘양’이란 말이 바뀌어 자연스럽게 굳어졌는지도 모른다. ‘춘양’이라는 지명보다는 ‘춘향’이란 인물이 훨씬 귀에 익으니까.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엔 ‘억지 춘향’만 나와 있다. ‘억지 춘향=억지로 어떤 일을 이루게 하거나, 어떤 일이 억지로 겨우 이루어지는 경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돼 있다. 경북지방에서 흔하게 쓰이는 ‘억지 춘양’이란 말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국어사전은 요즘 사람들이 실제 쓰는 말을 위주로 한다. 어디서 유래됐는지는 그 다음이다. 설령 ‘억지 춘향’이란 말이 ‘억지 춘양’에서 유래됐을지라도, 대한민국 사람들이 주로 쓰는 말은 ‘억지 춘향’이라는 뜻이다. 말은 생물이다. 더군다나 그 말을 부리는 인간은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생물’인 것이다.
▼ 500년 내려온 손맛 닭실마을 한과 ▼

‘500년 내림 손맛’ 닭실마을 한과를 만드는 안동 권씨 집안 며느리들. 18명 중 14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들은 매일 마을 부녀회관에 모여 옛날 방식 그대로 한과를 만든다.
‘500년 내림 손맛’ 닭실마을 한과를 만드는 안동 권씨 집안 며느리들. 18명 중 14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들은 매일 마을 부녀회관에 모여 옛날 방식 그대로 한과를 만든다.
봉화 닭실(유곡·酉谷)마을은 천하명당이다. 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금계포란·金鷄抱卵)이다. 멀리 크고 작은 산들이 마을을 둥글게 감싸 돈다. 사방으로 냇물이 마을을 둥글게 안고 휘돌아 나간다. 어디 하나 ‘복이 달아날 틈새’가 없다. 경주 양동마을, 풍산 하회마을, 안동 내앞마을과 함께 삼남 4대 길지로 꼽힌다(이중환 ‘택리지’).

1519년 기묘사화 당시 충재 권벌(齋 權·1478∼1548) 선생이 벼슬에서 물러나 자리 잡은 동네이다. 안동 권씨 집성촌으로 500년 가까이 내려왔다. 이곳 사람들은 ‘달실마을’이라고 부른다.

동네사람 모두가 친척이다. 솟을대문의 종가와 크고 작은 정자가 그림 같다. 거북 모양의 너럭바위에 들어앉은 청암정(靑巖亭)이 단연 으뜸이다. 거북바위 주위는 연못이다. 늙은 왕버들과 거북등 소나무가 수묵화 같다. 세월에 닳고 닳은 돌다리가 오랜 손때 묻은 농짝을 닮았다. 돌바닥이 늙은 아버지 등짝처럼 헐거워졌다.

사람 혀끝은 몇 대가 지나도 이어진다. 옷이나 집은 쉽게 바뀌어도 음식은 ‘세 살 입맛 여든까지 간다’. 닭실마을 한과는 ‘500년 내림손맛’이다. 권씨 집안 며느리들이 대대로 만들어왔던 제사 혼례 음식이다. 요즘도 18명의 며느리가 매일 한자리에 모여 옛날 방식 그대로 산자 강정 등을 만든다.

찹쌀 빻아 시루에 찌고, 떡살 말려서 기름에 지지고, 조청 달이고, 물엿으로 튀밥 묻히고, 건포도, 튀밥, 물엿으로 꽃무늬 내고…. 한쪽에선 찹쌀에 청주, 소주, 계핏가루, 생강 등으로 약과를 만드느라 부산하다. 일주일쯤 걸려야 비로소 맛을 볼 수 있다.

며느리들은 신옥매 씨(77) 등 대부분 60, 70대 한과 달인들이다. 김경순 씨(54)가 가장 어리다. 손맛 정성이 기본이다. 재료도 최고만 쓴다. 귀한 음식인데 함부로 만들 수 없다. 집안의 품격이 달려 있다. 만들 수 있는 만큼만 만든다. 백화점 주문도 고맙지만 정중히 사양한다. 직접 오거나 택배 주문(054-674-0788)만 받는다.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 Travel Info

승용차 서울∼중앙고속도로∼영주나들목∼국도 36호선∼봉화 버스 동서울터미널 봉화행 직행버스(3시간 30분 소요)

엄나무순돌솥밥 동궁회관(춘양면·054-672-2702) 40년 할머니 손맛 묵밥 애당식당(춘양면·054-672-8213) 송이돌솥밥 용두식당(봉성면·054-673-3144) 한우송이불고기 무진(옛 명산가든·소천면·054-673-9966) 보쌈족발 천하일미(봉화읍·054-673-4488) 송이국밥 송이식당(봉화읍·054-673-4788)

만산고택(춘양면·054-672-3206, 011-9572-3206) 권진사댁(춘양면·054-672-6118, 011-9022-6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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