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커버스토리]못다한 이야기… 권택수 새꿈터원장의 하루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4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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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서 가장 사랑스러운 열 일곱 자식들

《 권택수 새꿈터 원장은 자녀가 무려 17명이나 된다. 17명의 아들딸은 그가 ‘진짜 부모’들로부터 위탁받아 돌보는 원생들이다. 가족과 교류가 끊긴 아이도 일부 있다. 자신이 직접 낳지는 않았지만 권 원장은 원생들을 가슴으로 키운다. 그의 마음은 지적, 자폐성 장애인을 자녀로 둔 여느 부모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때론 힘들기도 하지만 이 아이들은 세상에서 제일 예쁜 사랑스러운 내 자식”이라고 말한다. 물론 원생들도 그를 아빠처럼 믿고 따른다. ‘원장 아빠’와 17명의 자녀가 행복하게 살아가는 새꿈터의 하루를 소개한다. 기사에 등장한 원생들의 이름은 모두 가명이다. 》
06:30 벌써부터 시끌시끌하다. 성호와 재준이는 반찬을 그릇에 담느라 분주하다. 민희는 선생님들이 만들어 놓은 국을 따뜻하게 데워 그릇에 담는다. 한쪽에선 응선이가 밥을 푼다. 1년 365일 아이들의 역할은 바뀌는 법이 없다.
식사 뒤엔 설거지를 맡은 아이들이 한쪽에서 그릇을 닦는다. 또 다른 아이들은 특수학교에 다니는 동생들의 등교 준비를 돕는다. 학교를 졸업하고 화장품 회사에 다니는 5명의 친구들과 실습 중인 3명의 친구들은 한껏 멋을 내고 출근 준비를 서두른다. 새꿈터 하루의 시작은 매일 이렇게 분주하다. 이렇게 바쁜 와중에도 아이들은 다른 친구들을 먼저 챙긴다. 얼굴은 항상 하회탈처럼 밝고 넉넉하다. 사랑스럽다. 그래서 난 아이들을 이렇게 부른다. ‘천사’라고.

10:30 명선이는 오늘도 열심히 선을 긋는다. 벌써 한 달째. 직선으로 그어 보라 하지만 항상 방향은 엉뚱한 데로 간다. 그래도 투덜대지 않고 하려는 모습이 예쁘다. 올해로 26세이지만 명선이는 신발끈 묶는 법을 배우는 데 1년이 걸렸다. 태우는 그림을 그리는 대신 자기 머리를 때린다. 습관처럼 저런다. 조금 더 일찍 여기 왔더라도 태우가 저럴까. 내 사랑이 더 컸다면 좀 나아지지 않았을까. 괜한 죄책감이 마음을 찌른다. 그래서 아프다.

13:00 오늘도 아이 5명을 데리고 나들이를 갔다. 지적·자폐성 장애인들의 비만율은 50%나 된다. 부모들이 밖에 데리고 나가길 두려워해서다. 그래서 난 틈만 나면 아이들을 데리고 나간다. 산이든 바다든 영화관이든 어디든 좋다. 오늘은 북한산에 갔다. 산행 시간만 6시간이 넘는 만만치 않은 거리. 그래도 세상에 나온 아이들의 표정은 누구보다 행복하다. 효주는 등산객들을 만날 때마다 허리를 90도로 굽혀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한다. 선거를 앞두고 산으로 유세 나온 후보자보다 더 열심이다. 그 후보자가 머쓱해하는 모습이 재미있다. 밖에 나오면 항상 안전이 먼저다. 우리 아이들에겐 높낮이 개념이 없다. 뛰다가 넘어지거나 굴러 떨어지면 크게 다친다. 그래서 밖에선 항상 일대일로 선생님이 따른다. 오늘은 대학생 자원봉사자들이 일일 선생님 역할을 맡았다.
요즘 신나는 일이 있다. 아이들 3명이 인근 유명 레스토랑에서 실습 중이다. 두 명은 주방에서 접시를 닦고, 한 명은 마늘을 깐다. 자폐증 아동들에게 가장 필요한 건 사회성이다. 세상과 부닥쳐야 세상을 배운다. 이미 직장 경력만 5년이 넘는 28세 진호는 자기가 번 돈으로 아버지 수술비를 댔다. 어려운 형편이라 목 수술을 미루고 있던 진호 아버지가 아들의 정성을 받고 눈물을 펑펑 쏟았던 장면이 떠올라 아직도 뭉클하다. 아이들은 얼마 되지 않는 돈을 벌면 이렇게 쓴다. 동생 대학 등록금을 마련해주고, 명절 때마다 집에 돈을 부치고, 부모님 전금에 보태고…. 날개 없는 천사들이 있다면 이 아이들이 아닐까.

19:00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다가 한 주민을 만났다. 불편한 표정으로 “계속 여기 있을 거냐”고 묻는다. 좋은 일을 하는 건 좋은데 왜 하필 여기냐는 얘기다. 주변 집값이 떨어진다고. 그냥 웃으며 “죄송하다”고 했다. 인근에 주유소와 공장, 노인복지시설 등이 위치한 이곳도 그나마 세 번째로 자리 잡은 터다. 원래 있던 곳에선 주민들 반대가 심해 쫓겨나듯 나와야 했다. 아이들은 사회와 가까워져야 하는데 구석으로 밀려나는 현실이 안타깝다.

20:00
삐뚤삐뚤 잘 쓰지는 못한다. 그래도 아이들은 정성 들여 일기를 쓴다. 집 청소, 방 정리를 한 아이들의 마지막 일과는 예배. 모두 한자리에 모여 감사예배를 드리고 10시쯤 잠자리에 든다. 난 아이들이 꿈나라로 간 후 혹여 아픈 데는 없나 죽 둘러본다.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행복한 표정을 짓는 천사들. 천국이 있다면 여기가 아닐까.

sukks2787@hamail.net

:: 새꿈터는? ::

경기 파주시 탄현면 법흥리에 있는 새꿈터엔 자폐성 장애인 10명과 지적장애인 7명이 모여 함께 생활한다. 원생의 나이는 16세부터 30대 초반까지로 다양하다. 권택수 원장은 20년 넘게 재직한 특수학교에서 나온 뒤 이들과 함께 10년 가까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아이들은 가족과 떨어져 있지만 부족한 부분을 서로 메워주며 생활한다. 또 직업 훈련을 배우며 사회 구성원으로 성장해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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