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와 둔황’ 특별전]켜켜이 쌓인 역사의 숨결, 둔황 막고굴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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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월 20일 10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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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오천축국전의 극적인 발견과 1300년만의 귀향

《1908년 2월 25일 프랑스 동양학자 폴 펠리오가 실크로드의 요충지인 중국 둔황(敦煌) 막고굴(莫高窟)에 도착했다. 중앙아시아조사단을 구성해 중국 신장(新疆) 위구르지역의 카슈가르에 들어온 지 1년 5개월 만이었다. 펠리오의 머릿속엔 온통 둔황문서뿐이었다. 신장위구르에 머물 때 둔황 막고굴에서 귀중한 고문서가 발견됐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도 기다렸던 둔황의 막고굴에 도착했으니 그의 몸과 마음은 날아갈 듯했다.》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둔황 막고굴 장경동 입구. 사진제공 국립중앙박물관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둔황 막고굴 장경동 입구. 사진제공 국립중앙박물관
막고굴 도착 다음 날부터 펠리오는 현지 조사에 착수했다. 곧바로 왕 도사를 만났다. 왕 도사의 이름은 왕원록(王圓(녹,록)). 1900년 둔황 막고굴로 흘러들어와 도사 노릇을 하던 사람이었다. 어느날 막고굴 16굴을 청소하던 중 우연히 17굴 석실을 발견했다, 그 안엔 3m가 넘는 높이로 무수히 많은 고문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각종 불경 등의 고문서를 수장하고 있다고 해서 이 17굴을 장경동(藏經洞)이라 부른다. 왕 도사는 일종의 관리인 역할을 하게 됐다.

도사를 통하지 않고는 둔황문서를 만날 수 없는 상황. 그래서 펠리오가 왕 도사를 찾은 것이다. 펠리오에 앞서 이곳을 찾았던 러시아 탐험가에겐 석실의 존재조차 알려주지 않았고 영국의 오렐 스타인에겐 석실 안으로 발을 들여놓지도 못하게 했던 왕 도사였다. 그러나 펠리오의 유창한 중국어 앞에 왕 도사는 무너지고 말았다. 왕 도사는 결국 석실 조사를 허락했다.

1908년 3월 3일, 조사가 시작됐다. 펠리오는 첫날 10시간 동안 쭈그려 앉아 고문서를 조사했다. 대부분 6∼10세기의 귀중 문서들이었다. 한문 경전뿐 아니라 다양한 언어의 고문서로 가득했다. 펠리오는 이 석실이 동양학의 보고라고 생각했다. 펠리오의 조사는 3주 동안 계속됐다.

조사 과정의 어느 날, 펠리오는 앞 뒤 일부가 떨어져 나간 필사본 두루마리를 발견했다. 서명도 저자명도 떨어져 나간 상태였지만 펠리오는 숨이 멎는 듯했다. 그건 틀림없이 혜초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었다. 펠리오는 중앙아시아 탐험에 앞서 혜초의 후배인 혜림이 8세기 말 편찬한 ‘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를 읽었다. ‘일체경음의’는 불교 관련 전적에 나오는 어려운 어휘들을 골라 주석을 붙인 책이다. 여기엔 ‘혜초 왕오천축국전’의 어휘 85개조를 인용하고 주석을 달았다. 이것을 이미 숙독한 바 있는 펠리오는 장경동의 두루마리 필사본을 보곤 ‘왕오천축국전’의 내용임을 한눈에 알아본 것이다. 그동안 습득했던 동양학 지식, 한자와 중국어 실력 덕분이었다.

펠리오는 왕 도사와 흥정을 했다. 17호 석실 안에 있는 모든 문서를 팔라는 흥정이었다. 왕 도사가 이를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펠리오는 그를 끝없이 설득했고 결국 왕 도사는 이 고문서들을 펠리오에게 넘겼다. 펠리오는 중요 문서 6000여 점을 선별해 500냥이라는 헐값으로 입수했다. 펠리오는 5월 30일 둔황을 떠나 10월 5일 베이징에 도착했다. 여기서 그는 문서를 포장해 프랑스로 부쳤다. ‘왕오천축국전’은 곧바로 파리에 있는 프랑스국립도서관으로 들어갔다. 이듬해인 1909년 5월 펠리오는 이 사실을 학계에 보고했다. 1915년 일본인 학자 다카구스 준지로는 혜초가 신라 승려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펠리오는 1908년 발표한 논문 ‘간쑤 성에서 발견된 중세의 한 장서(藏書)’에서 왕오천축국전 발견 당시를 이렇게 기록했다.

“저는 혜초 책의 주석 어휘들 중에서 두세 개를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크메르에 관한 것과 또 하나는 아마도 말레이제국을 지칭하는 곤륜이라는 어휘였으며 세 번째의 것은 틀림없이 사율, 즉 자블리스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어휘들의 순서로 보아 혜초는 중국을 떠나서 남해를 거쳐 서북 인도와 중앙아시아를 갔다가 돌아왔다고 하겠습니다.…이리하여 제가 결국 발견한 이 무명의 여행기는 그 주요 부분이 ‘혜초 왕오천축국전’이라고 생각됩니다.”(정수일 역주,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에서 인용)


많은 전문가는 혜초를 “한국 최초의 세계인”이라고 단언한다. 혜초는 704년경 신라 수도인 경주에서 태어났다. 719년 열다섯의 어린 나이에 밀교를 공부하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갔다. 4년 뒤인 723년 열아홉 살 때 그는 인도로 구법(求法) 기행을 감행한다.

광저우를 출발해 뱃길로 인도에 도착한 혜초는 불교의 8대 성지를 순례한 후 서쪽으로 간다라를 거쳐 페르시아와 아랍을 지나 다시 중앙아시아를 거쳐 파미르 고원을 넘는다. 이어 쿠차와 둔황을 거쳐 727년 11월 당나라 수도인 장안(지금의 시안)에 돌아왔다. 장장 4년에 걸친 약 2만 km의 대장정이었다.

혜초의 천축 여행은 기본적으로 구법여행이었다. 동천축국 여행에서의 주된 관심은 불교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중천축 남천축 서천축 북천축으로 옮겨가면서 혜초의 관심은 불교에 머무르지 않았다. 정치 경제 사회는 물론이고 의식주와 같은 일상생활, 언어와 지리 기후 등 자연환경으로 확장되었다. 인간 삶과 관련된 내용을 빠짐없이 기록한 것이다. 혜초는 구법의 길을 떠난 밀교승이었지만 동시에 호기심 가득한 문명탐험가였다. 혜초를 한국 최초의 세계인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의 여행 길은 실크로드를 관통했다. 혜초는 4년 동안 여행을 하면서 고향땅 경주를 그리워하기도 했다. ‘왕오천축국전’을 보면 그가 고향을 그리워하는 시가 나오기도 한다. 혜초는 이처럼 고국을 그리워했으나 당나라 땅 장안에서 밀교를 연구하다 780년경 76세의 나이로 삶을 마쳤다.

후대의 우리 한국인으로서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가 ‘왕오천축국전’을 품고 조국인 신라땅 경주에 돌아왔더라면…. 그래서 위대한 ‘왕오천축국전’이 한국땅에 남아 있게 되었더라면…. 하지만 이 모든 것이 2만 km를 여행한 한국 최초의 세계인, 혜초의 운명일지도 모른다. 또 ‘왕오천축국전’의 운명일지도 모른다. 오랜 세월 우리 곁을 떠나 있던 ‘왕오천축국전’. 그로 인해 우리는 이토록 멋진 말을 들을 수 있게 되지 않았는가. 1283년 만의 귀향!

▶ 세계문명전 ‘실크로드와 둔황’ 홈페이지 바로가기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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