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재현 기자의 망연자실]귀 막고 입 닫은 ‘거세된 家長’의 눈물

  • 동아일보

연극 ‘천국에서의 마지막 계절’
대본★★★☆ 연기★★★☆ 연출★★★ 무대★★☆

‘가족의 해체’라는 말조차 사치스럽게 여겨질 만큼 절망적 상황에 봉착한 가족을 그린 창작극 ‘천국에서의 마지막 계절’. 오른쪽은 사업 실패와 사채를 끌어다쓰면서 가장 구실을 못하게 된 아빠(장용철), 왼쪽은 야반도주해 숨어 사는 그를 찾아온 정체불명의 임신부(최복희). 사진 제공 극단 작은신화
‘가족의 해체’라는 말조차 사치스럽게 여겨질 만큼 절망적 상황에 봉착한 가족을 그린 창작극 ‘천국에서의 마지막 계절’. 오른쪽은 사업 실패와 사채를 끌어다쓰면서 가장 구실을 못하게 된 아빠(장용철), 왼쪽은 야반도주해 숨어 사는 그를 찾아온 정체불명의 임신부(최복희). 사진 제공 극단 작은신화

연극이 시작되고 30분은 지루했다. 아빠가 사업에 실패하면서 중산층에서 하루아침에 단칸방으로 쫓겨난 일가의 이야기에서는 현실을 진하게 우려낸 사골국물 맛을 느낄 수 없었다. 공주님에서 천덕꾸러기 신세가 된 중학생 막내딸(박소연)의 외계인 타령이나, 햄버거 가게 점원 노릇을 못해 먹겠다는 큰딸(송윤)의 푸념은 누런 기름처럼 둥둥 떠다녔다. 이럴 바에 차라리 원조교제로 돈을 벌겠다는 큰딸의 선전포고는 달짝지근한 인공조미료 맛을 풍길 뿐이었다. 불혹을 넘긴 몸으로 대리모 노릇이라도 해 목돈을 쥐겠다는 엄마(홍성경)의 황당한 발상이 그나마 시큼털털한 깍두기의 맛을 냈다.

연극이 제법 진한 맛을 내기 시작한 것은 세 모녀가 빠져나간 뒤 집안의 유일한 희망이요 등불인 고등학생 아들(오현우)이 등장하면서부터였다. 사채업자들에게 쫓겨 숨어 살면서도 학업을 중단시키지 않을 만큼 공부를 잘한다던 아들은 그 좋은 머리로 몰래 제조한 청산가리 알약을 치사량만큼 포장하기 시작한다.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그들을 구해줄 것이라고 믿었던 아들이 죽음이란 더 지독한 절망을 팔고 있었다는 시퍼런 역설이 소름을 돋웠다.

진국을 제대로 우려내는 것은 아빠(장용철)의 몫이었다. 그때까지 그는 계속 무대를 지키면서도 있으나 마나 한 존재였다. 잠꼬대를 하거나 화장실에 틀어박힌 채 조용히 성냥개비 탑만 쌓고 있을 뿐이었다. 사채업자들에게 끌려가 험한 꼴을 당한 뒤 귀 먹고 가끔 정신 줄까지 놓아버리는 그는 이 시대 ‘거세된 가장’의 표본이다. 은둔이 그의 권리라면 침묵은 그의 의무다.

가족들이 모두 빠져나간 뒤 비로소 화장실 밖으로 나온 그는 창문을 열고 거리의 활기찬 소음에 귀를 기울인다. 그렇다. 그는 귀먹지 않았다. 어차피 해결해줄 수 없는 가족의 고민에 귀를 닫고 살 뿐이었다.그리하여 가족들이 모두 집을 비운 시간만이 그에게 감각의 개방을 허용한다.

그러나 자유를 음미하는 그 순간은 너무도 짧다. 배불뚝이 임신부(최복희)의 방문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임신 8개월의 몸으로 언덕길을 간신히 올라왔다며 귀여운 푸념을 줄줄이 늘어놓는 그녀는 해머처럼 극 전체를 뒤흔들어 놓는다. 연극을 볼 관객을 위해 그녀의 정체는 밝히지 않는 편이 좋겠다. 다만 영화 ‘파고’에서 임신부의 몸으로 엽기적 살인사건을 해결해 가는 여자보안관 마지(프랜시스 맥도맨드)에 비견할 만한 독창적 캐릭터를 만나게 될 것이라고만 해두자.

이 배불뚝이 ‘푸른 천사’(기자가 붙인 가명이다)의 등장으로 연극은 현실을 능가하는 리얼리티를 획득한다. 그것은 ‘덫에 걸린 토끼가 덫을 빠져나오기 위해선 발목 하나는 내줘야 한다’는 처절한 현실에 대한 각성을 통해 이뤄진다. 남겨진 가족들에게 그런 현실의 얼얼함을 일깨우기 위해 토끼처럼 펄쩍펄쩍 뛰며 울음을 토해내는 아빠의 모습은 뜨거운 눈물을 자아낸다.

극 전반부와 후반부의 대조적 구도를 더 부각하면서 지나치게 사실적인 무대연출을 한층 상징적으로 끌고 간다면 해외연극제에 출품해도 부족함이 없을 창작극이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i: 이시원 작, 신동인 연출. 2만원. 28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 정보소극장. 02-889-35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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