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책읽기]느릿…느릿… 속도를 압도하는 삶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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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8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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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더듬이를 있는 대로 늘어뜨린/등 굽은 은백의 달팽이 한 마리/굳은 표정으로 꼼짝 않고 자리를 지키던 콘크리트 고가차도를 허문/혜화동 로터리에 새로이 난 버스중앙차도를/느리게 느리게 그러나 거침없이 가로지른다/ㄱ자로 허리를 꺾은 노파가 사력을 다해 끄는/폐지 더미를 가득 실은 손수레/거침없이 내닫는 속도를/온몸으로 위태롭게 그러나 천천히 더디게 가로막는/늙은 달팽이의 아슬아슬한 외출/제 몸뚱이보다 몇 배는 더 큰 삶의 집을 끄는/그네는 안다, 속도와 풍경을 압도하는/느림과 멈춤의 힘을(‘달팽이’ 부분)

차들이 무섭게 내닫는 대로 위. 등 굽은 달팽이 한 마리와 허리 굽은 한 노파가 조우합니다. 삶의 무게를 끌고 느릿느릿 자신의 길을 가는 그네들이 참 많이 닮았습니다. 속도를 압도하는 느림, 경건하기조차 합니다. 곽효환 시인이 2006년 ‘인디오 여인’ 이후 4년 만에 두 번째 시집을 펴냈습니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여전히 ‘생을 보듬는 따뜻한 시선’ 속에 느린 세계를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그림이 되어 멈추는 그곳에서 느리게/느/리/게 살았으면,/다시 그렇게’(‘아버지의 사진첩’ 부분). 한편 시간적 ‘느림’은 사방으로 열린 ‘넓은’공간으로 이어집니다. 여덟 편의 ‘열하기행’ 연작을 따라 광활한 대륙을 꿈꿔 보세요.지도에 없는 집(곽효환 시집, 문학과지성사)

김수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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