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재현 기자의 망연자실]마릴린 먼로가 된 10인의 남성들…죽음 부른 대중의 욕망 고발하다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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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 심벌’ 신화 뒤에 숨은
부끄러운 집단폭력 들춰내
극단 여행자의 ‘마릴린 먼로의 삶과 죽음’
대본 ★★★★ 연출 ★★★★ 연기 ★★★☆ 무대 ★★★☆
10명의 남자배우로 먼로의 삶을 재구성한 극단 여행자의 ‘마릴린 먼로의 삶과 죽음’. ‘누가 먼로를 죽였나’라는 선정적 질문에 답하기 위해 ‘마릴린 먼로되기’를 택한 이 연극은 ‘대중의 욕망’을 그 범인으로 지목한다. 사진 제공 코르코르디움
연극은 신화에서 출발했다. 그리스 신화를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전환한 그리스 비극이 그러하듯. 신화를 토대로 한 연극은 신화가 은폐하는 인간적 죄의식을 드러낸다. 신화화된 주인공이 집단폭력의 희생자라는 부끄러운 진실을.
극단 여행자의 연극 ‘마릴린 먼로의 삶과 죽음’은 현대적 신화가 된 먼로의 삶을 그리스 비극의 어조로 재구성한다. 여기서의 신화란 ‘20세기 최고의 섹스 심벌’이라는 이미지를 말한다. 잠자리에 들 때 향수 ‘샤넬 넘버 5’만 걸치는 요부, 그 덕택에 당대의 스포츠 스타(조 디마지오)와 노벨문학상 수상자(아서 밀러)를 남편으로 삼았던 행운의 여인, 그리고 당대 최고 권력자(존 F 케네디 대통령) 형제와 동시에 정분이 난 방탕한 여인….
이들 이미지가 야기하는 감정이 선망이든 비난이든, 거기엔 실체에 대한 무감각이 숨어 있다. 실체는 무엇인가. 아버지를 알 수 없는 사생아로 뒷골목에서 자란 노마 진 모텐슨, 열여섯에 팔려가듯 결혼해야 했던 가난한 누드모델, 괴테와 도스토옙스키를 읽으며 진지한 연기를 꿈꿨던 여배우 지망생, 세상을 향해 SOS를 보냈지만 번번이 무시당한 끝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대중스타…. 이미지의 응집력에 비해 우리에게 남겨진 실체의 흔적은 얼마나 파편적인가.
원작자인 독일 여성 극작가 게를린드 라이스하겐(1971년 초연)은 이 난관을 돌파하기 위해 콜라주 형식으로 연극을 구성했다. 압도적 이미지와 파편적 사실의 조각을 결합하는 방식이다. 먼로의 과거와 현재가 뒤섞이고 현실과 꿈이 교차한다. 이를 통해 먼로가 대중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섹스 심벌로서 재탄생했지만, 결국 자아와 허상의 괴리가 초래한 공허함을 이기지 못하고 파멸한 희생양임을 보여준다.
이 작품으로 연출 데뷔하는 조최효정 씨는 여기에 기막힌 아이디어를 더했다. 여배우 없이 남자배우 10명으로만 무대를 채우는 것이다. 속옷 하의만 걸친 그들은 돌아가면서 때로는 금발 가발을 쓰고, 때로는 하이힐을 신고 먼로의 걸음걸이와 제스처, 표정을 과장된 방식으로 흉내 낸다.
영화 ‘존 말코비치 되기’에 비견해 ‘마릴린 먼로 되기’라고도 부를 수 있는 이런 연출기법은 3가지 효과를 거둔다. 첫째, 웃음을 통해 먼로에 대한 선입견을 자연스럽게 무장해제 시킨다. 둘째, 욕망의 주체(남자)를 욕망의 대상(먼로)으로 바꿔 치는 역지사지를 통해 성적 차이를 뛰어넘는 공감의 지평을 확보한다. 셋째, 남성의 육중한 몸(욕망)에 갇힌 슬픈 여성으로서 먼로를 더욱 강렬하게 각인시킨다.
먼로가 20세기폭스사의 배우 오디션에 참가해 발탁되는 과정을 전략시뮬레이션 게임처럼 풀어낸 점도 신선하다. 먼로는 수위, 킹콩, 여배우라는 3단계 관문을 립스틱, 바나나, 권총이란 3개의 아이템을 활용해 통과한다.
여기에 레드 카펫을 연상시키는 바닥과 영화 시사회장 출입구를 모두 빨간색으로 통일한 심플한 무대 위에서 하얀색 쿠션을 수많은 소도구로 활용한 무대 연출은 고급스러운 느낌을 더한다. 전통의 현대화를 시도해온 극단 여행자를 대표하는 양정웅 연출과 또 다른 섬세한 감각으로 무장한 역량 있는 연출가를 만날 수 있는 무대다.
연극은 할리우드야말로 현대의 만신전(萬神殿)이라는 평범한 통찰을 재확인시켜주는 동시에 원시사회의 희생제의가 현대에 들어 대중문화로 전이되고 있다는 섬뜩한 통찰을 끌어낸다. 먼로가 약물중독으로 침실에서 숨진 뒤 9년 뒤 발표된 원작이 한국에 도착할 즈음 우리는 대중스타들의 잇따른 자살을 목도하고 있지 않은가.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i: 2만 원. 11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02-889-35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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