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가까이 1000여 개의 명품 벼루를 수집해 온 이근배 시인. 그는 한국 벼루의 정신적 예술적 가치에 대한 관심과 재평가를 촉구했다. 서영수 기자
《시 글씨 입담에 있어 문단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이근배 시인(70)은 작가 등용문인 일간지 신춘문예 5관왕이라는 대단한 기록을 갖고 있다.
문단 사상 최초로 한국시조시인협회장(1994년)과 한국시인협회장(2002년)을 역임했고 예술원 회원의 반열에도 올랐다.
이 같은 문학적 성취 외에 시인은 문화 예술계에서 자타가 인정하는 명품 벼루 컬렉터로도 유명하다.
1000여 점을 소장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자신은 ‘세계 최고’라고 자부한다.
시인이 서울 시내 모처 그의 아지트로 기자를 초대해 벼루 구경을 시켜줬다.
봄날의 황홀한 눈 호강이었다.
제대로 보려면 3박 4일은 봐야 한다는데 3시간여에 그친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벼루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압록강변 위원 화초석으로 만들어진 한국 벼루. 팥색과 녹두색이 잘 어울린 재질에 벼루에 새겨진 문양이 화려하다. 잎맥은 물론이고 벌레 먹은 부위까지 정밀하게 묘사돼 있다. “종이 붓 벼루 먹의 문방사우(文房四友) 가운데 벼루만 소모품이 아닌 반영구품입니다. 선비의 필수품이라고 할 수 있었죠. 선비는 이필위경(以筆爲耕·붓으로 농사를 짓는다)이라고 했는데 시를 업으로 삼다 보니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오래 되었나요.
“1973년 창덕궁에서 문화재관리국 주최로 열린 벼루전시회가 계기가 됐으니 40년이 가까워 오네요. 당시 명사들이 소장한 명품 벼루가 대거 출품됐죠. 나도 저런 것 한 점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이후 벼루에 미치는 단계를 넘어 한때 폐인 지경에 이르기도 했지요. 연벽묵치(硯癖墨痴·벼루 먹 수집에 미친 선비)라고나 할까요.”
거유(巨儒)였던 외할아버지와 명필이었던 할아버지의 영향도 컸을 것이다. 시인은 청소년 시절부터 집안의 제사 축문과 지방을 짓고 썼다.
―벼루는 어디 것을 제일로 칩니까.
“아무래도 단계석(端溪石)으로 만든 중국 것이 제일이지요. 일본은 벼루보다는 먹을 쳐 줍니다. 한국은 붓과 종이가 좋고. 그런데 중국 벼루를 능가하는 한국 벼루가 많습니다. 특히 압록강변인 평안북도 위원(渭原) 지방의 화초석(花草石) 벼루는 세계 최고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예요. 1973년 일본 벼루 연구가 요시다 긴슈(吉田金壽)가 쓴 책에는 이 벼루 장인을 ‘가위 입신(入神)의 경지’라고 표현할 정도였죠.”
신바람이 난 그는 녹두색과 팥색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위원 화초석 벼루를 연이어 내어 놓으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그가 내놓는 한국 명품 벼루에 새겨진 문양은 섬세하고도 치밀했다. 백제 금동대향로 문양처럼 선비 농부 소 연꽃 포도 등이 오밀조밀하게 새겨져 있는 벼루가 있는가 하면 이중섭의 그림에 등장할 법한 벌거숭이 어린이들이 각기 다른 표정으로 11명이나 등장하는 작품도 있다. 원숭이 포도 메뚜기 사슴 개구리가 새겨진 벼루는 잎맥과 벌레 먹은 잎까지 보일 정도로 섬세해 탄성이 절로 나온다.
―이처럼 뛰어난 한국 벼루가 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선비문화의 맥이 끊어지면서 벼루의 정신적 예술적 가치가 외면당하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제대로 된 연구 책자도 없습니다. 한국 벼루가 청자나 백자 못지않은 세계적 자랑거리라는 인식을 갖고 미술사와 조각사를 다시 써야 합니다. 저부터 자료 분류에서부터 시작해 ‘한국 벼루’에 관해 제대로 된 책을 한 권 쓰려고 합니다.”
―소장품 중에서 한국 벼루와 중국 벼루의 비율이 어떻게 됩니까. 특히 애착이 가는 작품은….
“한국 벼루가 500여 점, 중국 벼루가 500여 점입니다. 한국 벼루는 15, 16세기에 만들어진 위원 화초석과 장생문일월연 등을 걸작으로 꼽습니다. 중국 벼루는 당, 송, 명, 청대 벼루와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등 황제가 사용하던 벼루, 조맹부 주이존 유용 옹방강 완원 이홍장 등 명사들이 사용했다는 기록이 새겨진 벼루를 여럿 갖고 있습니다. 소장자들이 이런 명품 벼루에 먹을 갈아 무엇을 썼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그는 ‘정조대왕사은연’에 특히 애착을 갖고 있다고 했다. 청나라 건륭제의 열한 번째 아들이자 명필인 성친왕의 이름이 새겨진 벼루가 조선에 건너와 정조대왕이 대제학 남유용에게 하사했다는 글이 새겨져 있다. 남유용은 아버지 사도세자와 정조의 사부였다.
―벼루가 시의 모티브가 되기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벼루에 관한 연작시 80편 정도를 썼습니다. 시인이 이런 정도 오브제는 갖고 있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대단한 컬렉션인데 돈깨나 들이셨겠습니다.
“중국을 50여 차례 다녀왔고 국내에서도 좋은 벼루가 나왔다면 만사 제쳐 놓고 매달렸습니다. 중국 벼루의 경우 1990년대 초만 해도 1000달러면 살 수 있었던 것이 이제 몇만 달러를 호가할 정도로 값이 올랐지요.”
좋은 벼루를 구입하면 지인들을 불러 ‘벼루 잔치’도 벌인다. 술과 음식을 준비해 벼루를 완상하며 먹을 갈아 일필휘지를 하는 것이다. 대단한 풍류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문단에서조차 붓 희롱을 할 줄 아는 세대가 거의 사라져 안타깝다고 한다.
―이 많은 명품 벼루를 혼자만 움켜쥐고 계실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그렇지요. 하지만 제 힘으로 박물관을 세울 능력은 없습니다. 때가 되면 어떤 식으로든 길이 열릴 것으로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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