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하는 10만 원짜리 공연보다 더 좋다고 주변 엄마들에게 소개해요.”(주부 이혜숙 씨) “오전 11시, 반복적인 일상에서
숨구멍 같은 시간이죠.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 좋아요.”(주부 장경옥 씨)
짝수 달 마지막 주
목요일 오전 11시. 이들은 삼삼오오 공연장으로 모여든다. 가방에는 노트와 연필, 가슴에는 두근거림을 담고. 목적지는 경기
고양아람누리 아람음악당에서 열리는 ‘마티네 콘서트’다. 프랑스어 ‘마티네(matin´ee)’는 ‘아침나절’을 뜻한다. 한국에서는
평일 낮 공연을 주로 마티네라 부른다.》
○ 고전음악의 만물상
고양아람누리 마티네는 평일 오전 시간 공연이지만 유료좌석 점유율이 평균 82%를 넘는다. 인근 경기 파주, 김포와 서울에서 오는 관객이 전체 객석의 30%를 차지한다. 티켓 가격은 전석 1만5000원. 웬만한 클래식 공연 티켓이 10만 원을 훌쩍 뛰어넘는 것에 비해 ‘저렴한’ 편이다.
이 공연이 관객을 끄는 까닭은 초보자의 귀에도 착착 감기는 쉽고 익숙하며 달콤한 레퍼토리 때문이 아니다. 어렵지만 위대한 클래식 걸작에 한발씩 다가갈 수 있도록 손잡아주는 해설자가 있기 때문이다. 작곡가를 다룬 영화를 비롯해 다양한 시청각 자료를 활용해 관객의 이해를 돕는다.
올해 2월 25일 첫 마티네에서는 슈만 탄생 200주년을 맞아 한국 초연곡을 선보였다. 슈만이 사랑하는 아내 클라라의 34번째 생일 아침에 바친 4성부 합창 ‘클라라에게, 피아노의 은총 위에’를 어린이 합창단의 목소리로 들려줬다. 국내에 악보가 없어 독일 현지를 수소문해 구했다. 가사 번역은 마티네 콘서트의 ‘단골 관객’인 김영미 씨가 맡았다. 독일에서 화학 박사 학위를 받은 김 씨가 자원했다.
4월 29일 마티네에서도 국내 초연곡을 연주한다. 전설적인 지휘자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가 편곡한 바흐의 음악을 만날 수 있는 무대다. 프랑스 모음곡 5번의 ‘지그’를 피아니스트 강충모 씨가 선보인 뒤 여자경 씨가 지휘하는 3관 편성의 웅장한 오케스트라 연주로 다시 들어본다. 관객 이혜숙 씨는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잠시 벗어나 문화와 접하는 순간, 주부들이 공유하는 묘한 동질감이 공연장을 가득 메운다”면서 “음악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보석 같은 시간”이라고 말했다.
○ 대중의 클래식화
고양아람누리의 마티네가 2008년 첫선을 보일 때부터 ‘진지’했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누구나 잘 아는 대중적인 레퍼토리를 내놨다. 하지만 이곳은 ‘클래식의 대중화’ 대신 ‘대중의 클래식화’를 선택하기로 결정했다. 유혁준 고양문화재단 공연기획팀 차장(음악칼럼니스트)은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소품 위주의 레퍼토리는 위대한 작곡가의 수많은 걸작을 묻히게 하고 질 낮은 연주를 되풀이하게 만든다”고 지적했다.
지난해부터 조금씩 변화를 꾀했다. 클래식 음악 가운데서도 꽤나 난해한 곡으로 꼽히는 베토벤의 후기 현악 사중주를 들고 나왔다. 영화 ‘카핑 베토벤’에서 베토벤의 원숙기 대표작으로 꼽히는 ‘라주모프스키 사중주’가 흐르는 장면도 준비했다. 주부 관객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허민조 고양문화재단 공연기획팀 담당자는 “주부들이 쉽고 가벼운 클래식만 좋아할 것이라는 생각은 편견”이라면서 “학구적인 자세로 공연에 뛰어든다”고 말했다.
관객들은 마티네에서 기본을 다진 뒤 주말 저녁 클래식 공연까지 영역을 넓혔다. 관객 장경옥 씨는 “고등학교 3학년인 딸과 함께 세종문화회관 등 공연장을 즐겨 찾는다”면서 “클래식을 듣는 귀가 생겼다”고 웃었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청소년이나 주부, 노인층을 위해 티켓 값은 싸면서도 수준 높은 낮 공연이 흔히 열린다. 전문가들은 “다양한 시간대의 프로그램을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은다.
○ 한낮에 흐르는 선율
KBS 클래식FM은 쇼팽 탄생 200주년을 기념해 ‘한낮에 만나는 쇼팽’ 음악회를 준비했다. 3∼10월 매월 둘째 주 금요일 낮 12시에 서울 종로구 신문로 금호아트홀(8월은 전남 광주 금호아트홀)에서 공연한다. 쇼팽의 명곡을 피아니스트 한영란, 조재혁, 손은정, 첼리스트 이명진, 이숙정, 바이올리니스트 김이정, 플루티스트 배재영 등이 연주한다.
장옥님 KBS 클래식FM 팀장은 “저녁시간을 내기 어려운 주부들과 도심에서 근무하는 직장인들이 가벼운 마음으로 쇼팽의 명곡을 즐길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기 위해 콘서트를 기획했다”고 말했다. KBS 클래식FM이 마티네 공연을 시리즈로 마련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12일 첫 공연에는 금호아트홀 390석이 꽉 찼다. 이 공연장의 올해 첫 만석 기록이었다.
강성민 KBS1FM PD는 “예전 다른 낮 공연에 보통 300명 정도의 관객이 들었는데 이번에 생각보다 많은 분이 찾아주셔서 놀랐다”면서 “대다수 관객이 주부였다”고 말했다. 공연 2주전 KBS 클래식FM 홈페이지(www.kbs.co.kr/1fm)에서 신청을 받는다. 무료.
경기 성남아트센터는 올해 매월 셋째 주 목요일 오전 11시에 펼쳐지는 마티네 콘서트에 서울시립교향악단, 코리아심포니오케스트라, KBS교향악단, 세종솔로이스츠, 수원시립교향악단, 경기필하모닉 등을 불러 모았다. 진행은 바리톤 김동규 씨가 한다. 전석 2만4000원. 이지영 성남아트센터 홍보 담당 과장은 “올해 마티네의 키워드는 ‘고품격’”이라면서 “높아진 관객 눈높이에 맞춰 최고의 교향악단과 협연자를 엄선했다”고 말했다.
서울 예술의 전당 ‘11시 콘서트’는 마티네의 원조 격이다. 매월 둘째 주 목요일 오전 11시에 콘서트홀에서 관객을 맞이한다. 첼리스트 송영훈 씨가 진행을 맡는다. 전석 2만 원.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은 4월 한 달간 매주 수요일 오후 3시에 낮 공연을 연다. 연말과 방학 시즌에 제한적으로 선보인 마티네 공연에서 유료좌석 점유율 95%를 넘은 데 힘을 얻었다. VIP석은 15%, B∼R석은 20% 할인한 가격에 판매한다. 제작사인 설앤컴퍼니는 “다양해진 관객층의 변화를 반영해 마티네 공연을 점차 확산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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