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무릎 삭는 줄도 모르는 삶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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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2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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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이병률 지음/152쪽·7000원·문학과지성사

“겨우내 아무 일 없던 화분에서 잎이 나니 찬란하다//흙이 감정을 참지 못하니 찬란하다/감자에서 난 싹을 화분에 옮겨 심으며/손끝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를 듣는 것도/오래도록 내 뼈에 방들이 우는 소리 재우는 일도 찬란이다…지금껏 많이 살았다 싶은 것도 찬란을 배웠기 때문/그러고도 겨우 일년을 조금 넘게 살았다는 기분이 드는 것도/다 찬란이다.”

이병률 시인의 시들은 서글서글하면서도 진중한 눈빛을 가지고 있다. 삶의 밝음과 어두움이 해가 뜨고 저무는 것처럼 찬찬히 교차되고 눈앞에 펼쳐진 듯 섬세한 묘사들은 어느 순간 마음을 쿵, 움직이게 한다. 전작 ‘바람의 사생활’ 이후 3년 만의 신작 시집이다. 표제작 ‘찬란’처럼 일상 곳곳에 가닿는 시인의 시선은 잊혀져 있던 우리들의 애환을 이처럼 서정적으로 환히 밝혀낸다.

“일하러 나가면서 절반의 나를 집에 놔두고 간다/집에 있으면 해악이 없으며/민첩하지 않아도 되니/그것은 다행한 일//반죽만큼 절반을 뚝 떼어내 살다보면/나는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라/어느 곳에도 없으며…그리하여 더군다나 아무것도 아니라면 좀 살만하지 않을까/그중에서도 살아갈 힘을 구하는 것은/당신도 아니고 누구도 아니며/바람도 아니고 불안도 아닌/그저 애를 쓰는 것뿐이어서/단지 그뿐이어서 무릎 삭는 줄도 모르는 건 아닌가.”(‘생활에게’)

무심결에 피해버린 ‘어젯밤 구걸하던 이’를 찾는 시인의 안타까운 목소리는 타인에 대한 관심, 소통의 열린 마음을 잃어버린 우리들의 삶을 뼈아프게 돌이켜보게 한다.

“어젯밤 구걸하던 이를 찾습니다/내가 완강히 지나쳤으며 왼쪽 곁을 지나친 자입니다//어둔 밤 나에게 손을 내민 것인데/큰 칼을 내 심장 깊숙이 집어넣을 것 같아/피하려는 기색 감추느라/그가 다 지나간 다음에야 미친 듯이 심장이 뛰었던 이…어제 늦은 밤길 구걸하던 이/맵게 손목을 잡아 골목으로 끌고 가/이 어쩔 줄 모르는 삶의 방도를 조용히 물을/그 새(鳥)처럼 마른 이/못 보셨습니까.”(‘불편’)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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