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직장인 스트레스? “퍽에 실어 날려요”

  • 입력 2009년 10월 16일 02시 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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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스하키 동호회 가보니

“삐이익∼.” 날카로운 호루라기 소리가 관람객 하나 없는 텅 빈 아이스링크에 울려 퍼졌다. 링크 위 선수들의 눈빛이 바로 달라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함께 웃으며 농담하던 동료들이었다. 하지만 허공에 흩어진 호각 소리 한 번에 하키 스틱을 양손으로 움켜진 선수들은 퍽(puck·아이스하키에서 사용하는 공)을 향해 일제히 빙판 위를 돌진했다.

기백만큼 실력이 따라주지 않는다. 스케이트 실력이 부족해 앞으로 잘 나가다 빙판에 넘어지는 선수도, 퍽을 치려다 허공을 가르는 선수도 있다. 맹렬한 스케이트 속도를 멈추지 못해 경기장 벽면에 ‘쿵’ 하고 부딪치는 선수도 있었다.

오늘 연습은 인원까지 부족하다. 아이스하키의 골키퍼인 골리(goalie)도 한 명뿐이라 두 팀 중 한 팀은 텅 빈 골대를 향해 슈팅을 날린다. 불공평한 것 아니냐고 물었더니 “5cm 남짓한 빨간색 골대 쇠기둥을 맞혀야 점수가 인정되는 것이니 그렇게 불공평할 것도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화려한 스케이트 기술도, 시원한 골도, 격렬한 몸싸움도, 아이스하키라는 단어에서 응당 기대했던 것들은 없었지만 열정만은 가득하다.

“아마추어가 원래 다 그래요. 스케이트 타는 법을 우리 동호회 와서 처음 배우는 선수들도 많거든요. 그래도 매일 똑같은 생활을 하다가 여기 와서 부딪치고 넘어져 보는 게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빙판으로 모이는 거겠죠.”

11일 오전 7시. 경기 고양시 덕양구 고양어울림누리 지하 아이스링크는 아마추어 아이스하키 동호회 ‘프렌즈’ 선수들의 함성으로 가득했다. 이 동호회는 순수한 아마추어 모임이다. 회원 25명 중 아이스하키 선수 출신은 한 명도 없다. 흔히 아이스하키 동호회가 선수 출신 한두 명을 주축으로 시작하는 것과 비교하면 흔치 않은 일이다.

프렌즈 회원들은 일주일에 한 번 매주 일요일 고양 어울림누리 아이스링크를 빌려 2시간 동안 연습한다. 두 주에 한 번 정도는 다른 팀과 연습경기도 가진다. 연습경기는 회원 대부분이 직장인이라는 점을 고려해 오후 10시에서 10시 30분에 시작한다. 주장인 유동우 씨는 “혼자 스케이트 타는 것보다 여럿이 함께 경기하는 게 좋아 동호회를 결성하게 됐다”며 “회사원, 회계사, 약사, 학생 등 저마다 직업이 다른 사람들이 모여 ‘즐겁게 경기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고 말했다. 아직 국내에 대중적이지 않은 아이스하키라는 운동 경기가 이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 어떤 종류의 피곤함은 삶의 활력이 된다

프렌즈 멤버 안상현 씨(29)는 2007년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취직하면서 아이스하키를 시작했다. 그가 취업한 곳은 한 대기업 건설회사 영업직. 매일 매일의 업무에 쫓기는 회사원이 된 다음에 운동을, 그것도 다른 어떤 운동보다 거칠게 느껴지는 아이스하키를 시작한 이유를 물어 봤다.

“사실 어떻게 보면 여기 모인 사람들 모두 미친 것 같아요. 남들이 쉬는 시간에 일부러 장비 챙겨서 아이스하키 하러 오잖아요. 하지만 해 보면 알아요. 이젠 아이스하키 한 후에 밀려오는 피곤함이 오히려 삶의 활력이 될 정도니까요.”

안 씨는 비록 경력이 짧지만 공격수로 나선다. 그 때문에 재미도 생겼다. 있는 힘껏 퍽을 때리고 골이 들어가는 장면을 보면 일주일 동안 쌓인 스트레스가 완전히 날아가는 것 같단다. 그는 “처음 프로 선수들의 아이스하키 경기를 봤을 때는 굉장히 위험한 경기라고 생각했다”며 “하지만 아마추어 경기에서는 그렇게 과격한 보디체킹(몸싸움)은 피하는 편이라 보호 장비만 제대로 갖추면 충분히 즐길 만한 운동”이라고 말했다.

2분만 뛰어도 다리 후들후들
기본장비 100만원이면 OK

윤장근 씨(34)는 아이스하키 종목 자체의 운동량이 다른 운동보다 월등히 많기 때문에 오히려 운동 시간이 부족한 직장인에게 적합하다고 말한다. 그는 “아이스하키는 100m 달리기와 같은 대표적인 무산소 운동”이라며 “공격이든 수비든 항상 전력질주를 계속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짧은 시간에 많은 운동 효과를 원하는 사람에게 적합하다”고 설명했다. 아이스하키를 계속하면 튼튼해지는 대표적인 신체 부위가 허벅지와 발목. 공교롭게도 산행(山行) 효과와 비슷하다. 윤 씨는 “아이스하키를 계속하다가 최근 회사 등산행사에 나간 적이 있는데 거의 1등으로 들어올 만큼 체력이 좋아졌다”고 말했다.

프렌즈에는 여자 선수 5명도 함께 링크를 누빈다. 국내에는 아직 여성 아이스하키 마니아들이 모일 만한 동호회가 따로 없다 보니 대부분의 여자 선수들은 남자 선수들과 함께 연습한다. 동호회 실전 게임에서도 남녀 구분 없이 출전한다.

피겨스케이팅을 배우다 6년 전 아이스하키 동호회 활동을 시작한 김소영 씨(33·여)는 “여러 명이 함께할 수 있는 빙상 스포츠를 찾다가 아이스하키를 시작했다”며 “얼핏 생각하면 가장 남성적인 스포츠 같지만 오히려 실제 게임에서 남녀 구분 없이 출전하는 등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여성들도 편하게 즐길 수 있다”고 말했다. 2분의 출전 시간을 채우고 벤치에서 헬멧을 벗은 그녀의 머리에는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 비싼 ‘귀족 스포츠’라는 편견은 No

이들은 정말 ‘무작정’ 아이스하키를 시작했다. 예전부터 있었던 스케이트 동호회를 2006년 아이스하키 동호회로 바꾸고 운동을 시작했다. 당시 동호회에는 스케이트 경력이 어느 정도 되는 사람은 있었지만 아이스하키 경험자는 없었다.

“심지어 코치가 없어서 제가 코치를 보고 있어요. 물론 선수 출신 코치를 영입하면 회비 부담이 늘어난다는 문제도 있지만, 모여서 즐기는 데 코치가 굳이 필요하진 않겠죠.” 이렇게 이야기하는 주장의 손에는 작전판이 들려 있었다.

아이스하키에 관심이 있어도 ‘비싼 귀족 스포츠’라는 인식 때문에 쉽게 뛰어들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얼핏 봐도 비싸 보이는 각종 장비 때문이다. 실제 동호회 아이스하키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돈이 들까.

‘굉장히 비싼 장비에서부터 싼 것까지 다양하니 걱정할 필요 없다’는 것이 이들 아마추어 동호회원들의 의견이다. 프렌즈 팀의 대학생 회원인 김영서 씨(23)는 올해 8월 초 아이스하키의 세계로 처음 뛰어들었다. 이제 두 달 남짓한 ‘하키 새내기’인 셈. 김 씨가 투자한 ‘초기 투자 비용’은 80만 원 정도였다.

그는 “초보자가 처음 운동을 시작할 때는 그렇게 비싼 장비를 권하지 않는다”며 “100만 원 이내면 스케이트와 스틱, 그리고 대부분의 보호 장비를 구입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팀마다 다르긴 하지만 매달 내야 하는 회비도 다른 운동 동호회와 비슷한 수준이다. 프렌즈는 한 달에 3만 원가량의 회비를 내고 있다. “생각보다 운동하는 데 드는 비용이 비싸지 않다”는 게 김 씨의 말이다.

아이스하키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보호 장구가 중요하다. 보호 장구를 하나라도 가지고 오지 않은 회원은 설령 뛰려고 해도 “다음 주에 운동하라”며 자체적으로 만류하는 경우가 많다. 미끄러운 빙판 위에서 운동하다 보니 스스로 안전 의식을 가지는 것도 필수다.

가장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장비만 열거해도 헬멧과 케이지(안면부를 보호하는 철망 모양의 보호대), 가슴과 어깨 보호대인 숄더패드, 팔꿈치 보호대인 엘보패드, 목 보호대, 하키용 바지 등 10여 종에 이른다. 경기에 들어가기 전 라커룸에서 이들 장비를 하나하나 꼼꼼히 점검하며 착용하는 데서부터 아이스하키는 시작된다.

최근 국내 아이스하키는 동호회 중심으로 급격히 발전하기 시작했다. 아마추어 동호회가 100여 곳으로 늘어나며 프로 등 엘리트 선수보다, 스스로 운동을 위해 시작한 아마추어 애호가들의 관심이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아이스링크가 설치된 전국 대부분 지역에 아마추어 동호회가 있을 정도다.

이들 동호회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해당 지역 아이스하키 동호회를 먼저 찾아보는 게 중요하다. 프렌즈 인원 25명 중 절반 정도는 ‘인터넷 서핑’을 통해 찾아온 사람들이다. 이미 아이스하키를 하고 있는 사람의 추천을 받고 들어오는 경우도 많다. 최근에는 아마추어 동호회 홈페이지도 대부분 개설돼 있어 관심이 있다면 먼저 해당 지역 아이스하키 동호회를 인터넷으로 찾아보는 게 좋다.

때때로 삶은 일탈이 필요한 법이다. 삶이 무료하다고 느낄 때 열정과 열정이 맞부딪치는 빙판 위 스포츠인 아이스하키는 어떨까. 그게 일주일에 네 시간에 불과할지라도.

글=박재명 기자 jmpark@donga.com

디자인=공성태 기자 coonu@donga.com

▼1928년에 국내 첫 소개… 현재 아마클럽 100여개▼

한국에서 아이스하키는 아직 생소한 스포츠다. 올림픽 경기나 할리우드 영화, 북미아이스하키리그(NHL) 등을 통해 낯익기는 하지만 기본적인 룰을 모르는 사람도 아직 많다.

아이스하키는 총 3피리어드, 60분 동안 진행된다. 1피리어드가 20분으로 경기 시간은 축구나 야구 등에 비해 짧은 편이다. 한 팀 전체 인원은 22명이며 빙판에 나가는 선수는 6명으로 제한된다. 다른 스포츠와 달리 ‘무한 교체’가 가능하다는 특징이 있다. 실제 프로 아이스하키 게임에서는 한 선수가 보통 2분 정도 경기하고 들어와 쉬는 경우가 많다.

한국에 아이스하키가 도입된 것은 일제 강점기인 1928년. 일본 도쿄대 아이스하키팀이 서울에서 가졌던 시범 경기가 처음이었다. 같은 해 철도국 등이 빙구(氷球)팀을 결성하면서 국내 아이스하키팀이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이후 1930년대는 경성사범학교, 연희전문학교 등의 팀이 창설됐으며 각종 연맹전이 잇따르는 등 국내에서 아이스하키가 ‘인기 있는’ 스포츠로 떠오른 전성기였다.

아이스하키팀들은 속속 나타났지만 일년 내내 경기를 할 수 있는 실내 아이스하키 경기장이 만들어진 것은 1962년이 되어서였다. 그해 서울 동대문구 창신동에 아이스링크가 준공되며 본격적인 실내 빙상 경기의 막을 열었다. 50년 가까이 지난 지금은 전국에 50여 개 아이스링크가 있다. 대한아이스하키협회에 따르면 국제 경기를 치를 수 있는 길이 60m, 폭 30m의 경기장도 20개가 넘는 것으로 집계된다.

현재 국내에 있는 아이스하키 클럽은 100여 개. 거의 대부분은 아마추어 동호인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것이다. 그동안 ‘엘리트 스포츠’로 인식되던 아이스하키가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스포츠’로 생각이 바뀌고 있다는 증거이다.

이런 경향은 2000년대 들어 더욱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국내 실업팀인 하이원의 김희우 감독은 “아마추어 동호회의 잇따른 창설은 국내 아이스하키 저변이 확대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이를 프로리그와 국제 경기에서의 성적 향상으로 연결시켜 아이스하키에 대한 관심을 더욱 끌어올려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재명 기자 jm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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