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이야기]<670>敢問死하나이다. 曰, 未知生이면 焉知死리오

  • 입력 2009년 6월 4일 02시 59분


지난 호(669)에 이어 공자와 제자 季路(子路)의 대화가 이어진다. ‘논어’ ‘先進(선진)’ 편의 같은 章을 둘로 나누어 보았다. 이번 대화는 죽음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敢問死에서 敢問은 자신보다 윗분에게 어떤 사항을 질문할 때 공손하게 여쭙는 어법이다. 주어는 앞에 나왔던 季路다. 曰 이하는 공자의 말이다. 앞에서 子曰이라 했으므로 여기서는 子를 생략했다. 한문의 대화문에서는 뒤에 나오는 曰의 주어를 생략하는 일이 많다. 未知는 ‘아직 ∼을 모른다’, 焉知는 ‘어찌 ∼을 알겠는가’이다.

공자는 은나라의 上帝 관념, 주나라의 天命 사상과 禮 이념을 계승하되, 하늘에 대한 관심을 인간에 대한 관심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런데 공자가 高弟인 子路에게조차 귀신과 죽음의 문제를 명료하게 설명해 주지 않은 사실을 두고 呑棗(탄조)에 가깝지 않나 의심할 수 있다. 탄조란 골륜呑棗(골륜탄조) 혹은 渾淪呑棗(혼륜탄조)를 줄인 말이다. 음식물을 씹지 않고 그냥 넘기는 것을 혼륜탄이라 하는데, 대추를 씹지 않고 그냥 삼키면 맛을 알 수 없듯이 학문을 논하면서 조리를 분석하지 않고 모호하게 처리한다는 말이다.

주희는 공자가 (렵,엽)等(엽등)을 경계했다고 풀이했다. 즉, 삶과 죽음, 생명의 시원과 종말은 본래 같은 이치이지만 배움에는 순서가 있어서 등급을 뛰어넘을 수 없다고 천명했다는 뜻이다. 주희는 이렇게 말했다. “성의와 공경으로 사람을 섬기지 못한다면 반드시 神을 섬길 수 없을 것이며, 시초의 근원을 추구하여 태어난 연유를 알지 못한다면 반드시 종말로 돌아가서 죽음의 의미를 알 길이 없을 것이다.” 정약용도 주희의 해설을 존중했다. 지금은 역시 인간답게 살아가는 문제를 더 생각해야 할 때이다.

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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