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16>

  • 입력 2009년 1월 28일 02시 59분


일러스트레이션 김한민
일러스트레이션 김한민
제1부: 나는 장님이 되어 가는 사람의 마지막 남은 눈동자처럼 고독하다

제4장: 바디 바자르에서 생긴 일

짝사랑을 받을 때 난감한 이유는 간단하다. 너는 사랑 때문에 죽을 맛인데 나는 느낌이 없다는 것. 그럴수록 너는 내게 집착한다는 것. 사랑이 아니어도 일방적인 관심이나 개입은 힘겹다. 강제조항이 덧붙을 때는 더더욱 낭패다. 석범에겐 아바타 컨설턴트 달마동자가 그렇다.

저녁 7시, 위생청의 예고대로 싸라기눈이 내렸고, 재즈 선율이 행인의 발자국에 젖어 녹았고, 앨리스는 석범의 책상 주위를 맴돌았다.

“할 말 있어?”

“야근하실 건 아니죠? 휴일 전날 파트너에게 한 잔 사겠다고 약속하셨잖습니까?”

내일은 격주로 돌아오는 대뇌수사팀만의 휴일이다.

“다음에!”

석범이 자료화면을 빠르게 넘겼다.

“이번 주는 1년 만에 처음으로 강력사건이 단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백만금을 줘도 오늘 같은 날은 놀아야죠.”

석범이 고개를 돌렸다. 앨리스의 초록 눈동자가 촉촉하고 맑았다.

“……꼭 마셔야겠어?”

“꼭!”

석범이 손바닥을 마주 비비고 오른 눈썹만 살짝 올렸다. 즐거움과 우울함이 공존하는, 보안청 여직원들 사이에선 ‘은검미소’로 통하는 표정이었다.

“그럼 딱 한 잔만! 대신 술집은 내가 정할게. 불만 없지?”

그 질문에 답한 이는 앨리스가 아니라 달마동자였다.

“불만 많-습니다. 내일 점심 약속 잊진 않으셨지요? 이성끼리 첫 만남이니 준비를 철저히 하십시오. 과음은 컨디션을 저하시키고 두통과 발열을 동반합니다.”

배불뚝이 달마동자는 피터 팬을 따라다니는 팅커 벨처럼 낮밤 없이 등장했다. 장삼에 가사를 걸치고 염주까지 든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제법 의젓했다.

위생청이 특별시의 아바타 컨설턴트 업무를 총괄했다. 공무를 집행하는 이에게는 의무적으로 레벨 1 컨설턴트가 붙었고 보안청과 소방청 근무자에게는 레벨 3이 부여되었다. 석범의 경우는 레벨 5였다. 레벨 3까지는 고객이 컨설턴트의 방문을 거절 혹은 연기할 수 있지만, 레벨 4와 5는 컨설턴트를 무조건 만나야만 했다. 컨설턴트와의 접촉을 피하면 즉각 체포된다.

“이, 성, 끼, 리 첫 만남이라고요?”

앨리스가 눈을 흘겼다. 석범이 달마동자를 쏘아붙였다.

“약속은 무슨…… 안 나간다고 했잖아?”

“벌써 점심 메뉴까지 주문을 마쳤더군요. 취소가 되지 않는 예약입니다.”

“여자를 만나고 안 만나고는 특별시민인 내 자유야. 컨설턴트가 할 일이 그리도 없어?”

“레벨 5 컨설턴트는 고객의 일거수일투족을 관리합니다. 미혼일 경우는 당연히 이성교제까지 챙겨야지요. 지금까진 이렇다 할 만남이 없었기에 별다른 조치를…….”

“알았어. 나중에 따로 얘기하자고. 어서 사라져!”

“6시간 이상 숙면을 취하셔야 합니다. 새벽 3시까지 귀가하지 않을 때는 레벨 6의 조치를 내릴 겁니다.”

레벨 6은 매주 지정 장소에 출석하여 특별교육을 받아야 한다. 지루하고 끔찍한 일이다.

달마동자가 사라진 후, 석범은 앨리스를 데리고 한강을 건넜다. 늦은 시각인데도 하이브리드 전기자동차가 줄지어 늘어섰다. 2040년부터 천연자동차 기준에 미달하는 오염자동차들의 특별시 출입이 금지되었다. 2008년 개발 초기에는 낮은 속력이 문제였지만 지금은 시속 500킬로미터로 질주하는 전기자동차까지 등장했다.

석범이 문리버 호텔 쪽으로 방향을 꺾었다.

“왜 하필 여길…… 신나는 파티도 많은데…….”

앨리스가 울상을 지었지만 석범은 못 본 체하고 차를 세웠다. 호텔 뒷문으로 이어진 언덕에 사이보그 거리가 자리를 잡았다. 대표적인 우범지역이었다.

거리 입구에 우뚝 솟은 대문은 중세 유럽의 성문을 닮았다. 검은 대문에 기대 선 험상궂은 사내들이 석범과 앨리스를 쏘아보았다. <기계몸 20퍼센트 이하 출입 엄금>이라고 적힌 둥근 경고판이 대문 꼭대기에 매달려 시계추처럼 흔들렸다. 80퍼센트 이상 천연몸은 접근 말고 꺼지라는 위협이었다. 석범은 사내들의 난폭한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검사님! 괜찮으시겠습니까?”

앨리스가 속삭였다. 둘은 비록 파트너지만 기계몸과 천연몸 비율을 확인한 적이 없었다.

석범이 대답 대신 오른발을 대문 안으로 넣었다.

사내들은 턱만 돌려 대문 빛깔을 슬쩍 살폈다. 앨리스의 눈길도 그곳으로 향했다.

차가운 푸른 색, 사이보그의 색이다.

20퍼센트 이상 기계에 의지하여 생명을 잇는 족속임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 알립니다 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은 지면 게재일 전날 오후 2시부터 동아일보 홈페이지(www.dongA.com)에서 미리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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