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694년 佛철학자 볼테르 출생

  • 입력 2008년 11월 21일 02시 57분


“여전히 세상 모든 게 최선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믿으십니까.”

프랑스어로 ‘천진하다’는 뜻의 이름을 가진 청년 캉디드는 노예선 선원으로 전락한 스승 팡글로스를 우여곡절 끝에 만나 이렇게 묻는다.

캉디드는 원래 독일 베스트팔렌 지방의 한 성(城)에 살았다. 성주의 누이동생이 낳은 사생아인 그는 가정교사 팡글로스에게서 “만물은 모두 최선의 형태로 존재하며, 만사는 최선으로 이뤄진다”는 철학을 배웠다.

캉디드는 가르침을 철석같이 믿었다. 사촌 여동생뻘인 성주의 딸 퀴네공드와 키스한 죄로 쫓겨날 때까지는. 이후 캉디드는 스페인 아르헨티나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를 떠돌며 참혹하고 비참한 인간사를 낱낱이 경험하고 회의를 느낀다. 전쟁 통에 아름다운 외모와 순결을 잃은 퀴네공드를 찾아낸 캉디드는 그녀와 결혼해 농사를 지으며 삶을 개척한다.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자 볼테르의 철학소설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1759년 작)의 내용이다. 당시 정치 지도자, 성직자들의 무능력과 부패상, 라이프니츠의 낙관주의적 철학의 허구성 등을 재치 있는 필치로 그려낸 걸작.

1694년 11월 21일 프랑스 파리에서 법원 공증인의 아들로 태어난 볼테르는 자유분방한 성격과 신랄한 풍자로 평생 필화(筆禍)를 몰고 다녔다. 본명은 프랑수아마리 아루에.

예수회가 운영하는 학교에서 공부한 뒤 자유주의 사상가들과 교류하던 그는 23세 때 정치 실권자를 조롱하는 풍자시를 썼다가 바스티유 감옥에 갇혔다. 11개월 후 출감한 그는 희곡 ‘오이디푸스’ 등을 발표해 명성을 쌓았고 볼테르란 필명을 쓰기 시작했다.

그의 무례함에 화가 난 귀족과 빚은 마찰로 다시 바스티유 감옥에 투옥된 볼테르는 영국 망명을 조건으로 석방됐다. 영국에서 계몽주의 사상을 정립하고 프랑스로 돌아간 그는 ‘앙시앵 레짐(구체계)’을 비판한 뒤 로렌 공국에 있는 애인 샤틀레 부인의 집으로 피신해 10여 년간 칩거하며 책을 썼다.

51세 때 프랑스 왕실의 사료 편찬관에 임명됐지만 왕실과 관계가 다시 악화돼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에게 몸을 맡겼다. 당대 최고의 대중 스타였던 그가 머무는 동안 프로이센 궁정은 유럽 사교계, 문화계의 중심이 됐다.

프로이센 국왕과도 갈등을 빚은 그는 스위스와 프랑스 국경에 있는 페르네 지방에 살면서 ‘백과전서파’와 철학자들과 연계하며 정치, 종교적 기득권을 비판했다.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도 이 시절의 작품.

84세 때였던 1778년 대대적 환영을 받으며 파리로 귀국한 그는 3개월 만에 숨을 거뒀다. 11년 후 시작된 프랑스 혁명이 성공한 뒤 주체 세력들은 혁명 정신의 불씨를 피운 볼테르에 대한 존경심의 표시로 그의 묘를 팡테옹으로 옮겼다.

박중현 기자 sanju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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