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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8년 10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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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문 때문이었다. 석굴암을 보존하기 위해 주실(主室·본존불이 있는 방)로 통하는 전실(前室) 앞면을 유리문으로 막아 놓은 것이 어제오늘 일도 아닌데 그날따라 유리문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그 아쉬움의 실체는 관람객들의 얼굴에서 경외감 혹은 감동을 발견할 수 없었다는 점.
감동의 단절은 유리문 때문이었다. 관람객들은 유리문 앞에서 전실과 주실 쪽을 기웃거리다 이내 밖으로 빠져나가곤 했다. 여기저기 유리의 반사로 석굴암의 진면목을 감상하기란 쉽지 않았다. 전실의 팔부중상(八部衆像·불법을 수호하는 불교 신들의 조각상)에 조명까지 뒤섞여 관람을 심하게 방해받았다.
게다가 유리문의 알루미늄 새시 틀이 마음을 짓눌렀다. 석굴암의 품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알루미늄 새시. 거기에 멋없기 짝이 없는 자물쇠까지 덜렁 채워 놓았으니 이곳에서 감동을 받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석굴암 및 문화재 관계자 몇몇은 문을 열고 전실과 주실로 들어가 그 성스러운 공간을 체험할 수 있지만 일반인은 그럴 수 없다. 석굴암 유리문을 이대로 둘 경우 석굴암 관람객들은 석굴암에 가도 석굴암을 제대로 느낄 수 없는 형편이다. 생각이 이 즈음에 미치자 서울 탑골공원에 있는 원각사터 10층 석탑(국보 2호·1467년)이 떠올랐다.
보호를 위해 탑 전체를 유리 보호각으로 완전히 씌워 놓은 원각사터 10층 석탑. 산성비와 비둘기 배설물을 막아낼 수는 있지만 경관은 완전히 망가졌다. 유리의 반사로 인해 탑의 전체적인 모양이나 몸체에 새겨진 무늬를 제대로 감상할 수 없다. 가까이 가보면 유리 보호각은 먼지와 얼룩으로 지저분하기 짝이 없다.
석굴암과 원각사터 10층 석탑을 보존해야 한다는 데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다. 문제는 그 방식이다. 감동과 아름다움을 제대로 살리면서 보존대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말이다.
누군가가 “쉽지 않은 일이다”, “양자택일이 불가피하다”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대상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석굴암이고 아름다운 원각사터 10층 석탑이라면 생각은 달라져야 한다. 이들 문화재의 감동을 앗아가서는 곤란하다.
보존이라는 명분 아래 석굴암 앞을 유리문으로 턱 하니 막아 놓은 것이나 유리 보호각으로 탑을 덮어씌운 건 일차원적이고 가장 손쉬운 방법일 뿐이다.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해도 이젠 그 득실을 냉정히 따져보아야 한다.
발상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 감동을 주지 못하는 석굴암 유리문의 득실을 냉정히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유리문을 존속해야 하다면 그 디자인을 샅샅이 점검해 석굴암에 어울리도록 바꿔야 한다. 또 유리문을 철거한 뒤 평소엔 개방하지 않다가 한 달에 하루 제한된 시간에만 공개하는 방안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럴 경우 관람 인원도 엄격히 제한해야 한다. 감동을 주지 못하는 지금 석굴암의 유리문 보존 방식보다 제한된 인원에게라도 감동을 주는 것이 훨씬 낫지 않을까.
원각사터 10층 석탑도 마찬가지다. 어려운 작업이겠지만 유리 보호각 없이 자연에 노출된 상태에서의 보존 방법을 찾도록 노력해야 한다.
언제쯤이면 석굴암에서 감동을 되찾을 수 있을까. 돌아서서 석굴암 일주문을 나설 때까지 이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광표 사회부 차장 kp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