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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8년 4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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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사건기록, 四書보다 숙독하라”
유승희 교수 ‘미궁에 빠진 조선’ 펴내
조선 정조 23년인 1799년, 황해도 곡산부사 정약용은 정조의 긴급한 부름을 받고 조정으로 복귀했다.
정조는 정약용에게 “함봉련 사건에 의문점이 있으니 자세히 심리하라”고 명령했다. 함봉련은 서필흥의 살해범으로 지목돼 옥에 갇혀 있던 인물. 나졸이던 서필흥은 김상필에게 국가가 빌려준 환곡(還穀)의 이자를 받으러 갔다 집단 구타를 당해 사망했다.
주변의 증언과 시체 검험(檢驗) 등을 통해 김상필의 집에 머슴으로 살던 함봉련이 주범으로 지목됐지만 함봉련은 계속 범죄를 부인했다. 정약용은 사건 기록과 시체 검험서 등을 면밀히 다시 살핀 뒤 주범이 김상필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증인들이 김상필의 일가친척이어서 함봉련에게 누명을 씌워 진범으로 몰았던 것이다.
유 교수의 연구는 여러 면에서 의미 있는 작업으로 평가받는다. 우선 굵직한 사건 중심으로 조선시대를 연구하는 학계의 풍토 속에 미시사적으로 백성들의 생활을 들여다봤다는 점이다. 미시사 가운데서도 범죄사 연구를 하는 학자는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다.
유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사형에 처해지는 중범죄 가운데 가장 많았던 범죄는 살인이었다. 특히 18∼19세기 한성부(수도 한양)는 강력 범죄의 온상이었다. 한성부의 살인은 8도 가운데 건수가 가장 많았던 황해도의 5배에 이를 정도였다.
살인을 한 죄인은 원칙적으로 사형에 처해졌다. 특히 부모를 살해한 죄인에게는 이유를 불문하고 사형이 선고됐다. 중범죄의 주된 원인은 재물이었다. 돈을 노린 강도살인 사건도 많았고, 재물 다툼을 하다 살인을 저지르는 일도 잦았다. 하지만 부모를 살해한 자를 보복 살인한 경우, 간통한 아내를 살해한 경우 등 ‘명예’와 관련된 살인사건에선 죄인들이 사형을 면했다.
같은 살인사건이더라도 사건의 경중(輕重)에 따라 사형의 방식이 달랐다. 범죄가 중한 순으로 사지를 자르는 능지처참, 목을 베는 참형, 목을 매는 교형이 집행됐다.
18∼19세기 전체 범죄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은 절도였다. 특히 관인들이 궁궐의 기물이나 관고(官庫)의 물건을 훔쳐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유 교수는 “범죄사를 연구하면서 부수적으로 얻은 소득도 많았다”고 말한다.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사건의 진실 파악에 각별히 신경을 쓴 정조의 노력을 확인한 것이 소득 가운데 하나였다. 유 교수는 “정조는 사건 기록을 ‘사서삼경’ 읽는 것보다 더 정확하게 읽으라고 강조했다”고 전했다.
유 교수는 논문에 쓴 내용의 일부를 이야기 식으로 풀어 ‘미궁에 빠진 조선’(글항아리)을 최근 펴냈다. ‘조용한 시골 마을을 발칵 뒤집은 두 건의 살인’, ‘음주 난투극과 조선 후기의 유흥 문화’, ‘양반집 과부와 바람난 정경문 구타 살해 사건’ 등의 이야기가 소개돼 있다.
유 교수는 “범죄사를 연구하면서 조선시대 사람들의 생활과 생각의 단면을 엿볼 수 있었고 당시의 사회적 갈등 양상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