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명랑’…세월을 뒤섞은 여자들의 생명

  • 입력 2008년 4월 8일 08시 16분


“당신만 아세요. 여든일곱∼ 살이에요.”

TV 오락프로그램에서 가수 탁재훈이 열일곱을 여든일곱으로 바꿔 부르자 그 자리에 있던 여성 출연진들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립니다. 마침 연하남과 결혼한 중년 탤런트가 자신의 신혼 생활을 알콩달콩 뽐내던 중이었습니다. 탁재훈의 은밀하고 애교 섞인 목소리가 재미도 있었지만, 아마 그 가사가 주는 아이러니한 기분 탓이겠지요. 여든 할멈 몸으로 열일곱 소녀의 아양을 보인다면, 그 이상한 불일치가 익숙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할머니 가슴의 울렁거림. 웃음의 요소가 됐지만 아름답습니다. 바로 ‘천상 여자’라는 끈끈한 동질감 때문이지요.

스물이든 여든이든, 공통되게 여자들이 느끼는 끈적끈적한 기분들이 있습니다. 목련꽃이 활짝 피면 새로운 걸 찾아 떠나야 할 듯 두근거리고… 첫 눈이 오면 옛사람이 그립고… 낙엽이 떨어지면 무심히 세월을 후회하게 되는 비슷비슷한 감정 말입니다. 남들 눈에 추레하게 보여도 개인의 취향이 얽혀 아름다운 게 있고, 또 같은 미적 취향으로 취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어찌 보면 소녀와 할머니는 겉으로 표정을 달리한 하나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만든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여주인공 ‘소피’처럼 말이죠. 소피는 마법에 걸려 갑자기 할머니로 변하지만, 아주 꿋꿋하게 ‘소녀할멈’으로 세상의 역경을 헤쳐 나갑니다. 뼈가 시리고 거동이 불편해 ‘할머니가 되니 이렇게 온 몸이 아프구나’ 말하면서도 생명력을 잃지 않습니다. 천운영 소설 ‘명랑’ 의 여주인공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명랑에서는 바로 ‘여자’란 이름으로 보편화된 자연스러운 ‘인간’을 구절구절 만날 수 있습니다.

손녀딸이 바라보는 풍경으로 묘사되는 이 소설에는 죽음을 앞둔 할머니가 등장합니다. 할머니는 ‘명랑’이라는 진통제를 먹으며 생명을 이어갑니다. 두통, 관절통, 인후통 등 각종 16가지 통증과 해열 효능까지 있다는 이 약을 할머니는 꼭꼭 챙겨 드시죠.

한 줌밖에 되지 않는 머리카락과 검버섯 핀 손, 처진 눈꺼풀, 손이 닿으면 금세 발갛게 흔적이 남는 여린 살, 할머니의 몸은 이제 늙어버렸습니다.

하지만 버선 위의 국화꽃을 만지작거리고 조용히 담배를 집어 드는 할머니는 세월의 흔적이 묻은 오래된 매력이 있습니다. 은근 자랑스러움이 밴 자세로, 크고 단단한 가슴을 손녀에게 보여주기도 합니다. 할머니를 통해 손녀는 삶을 대하는 욕망, 죽음에 대한 두려움 등 각종 감정을 경험하고 자신을 찾아갑니다.

발 관리실에서 일하던 손녀는 할머니가 죽고 그처럼 ‘작고 아름다운 발을 본 적이 없다’고 회상합니다. 할머니의 유해, 곱게 빻아진 뼛가루를 마치 할머니가 드시던 ‘명랑’인 것처럼 손녀는 그걸 찍어 맛을 보기도 합니다. 언뜻 흉측할지 모르지만, 할머니를 동경했던 손녀가 그를 떠올리는 방식일 뿐입니다. ‘내 속에서 숨쉬고 내 속에서 잠을 잔다’고 독백하며 말입니다. 할머니는 진화와 소멸을 함께 보여주던 생명이었습니다.

작가 천운영은 이 소설에서 할머니의 외양을 섬뜩할 만치 감각적이고 세밀하게 전달합니다. 아등바등 생활을 견뎌내면서 힘겨워하는 여자들, ‘명랑’에는 여자들의 고된 체취와 얼굴이 그대로 있습니다. 손녀는 할머니의 무심한 모습을, 할머니는 손녀의 젊음을, ‘세월을 거스르고’ 뒤섞어 동경하면서 여자들의 세상을 보여줍니다.

변인숙 기자 baram4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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