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의 발견]꿈을 따는 와인오프너의 은밀한 기쁨

  • 입력 2008년 3월 7일 03시 00분


이탈리아 출신의 알레산드로 멘디니가 디자인한 ‘안나’는 와인오프너 이름이다. 특이하게도 귀여운 여인의 모습을 띠고 있다. 앙증맞고 예쁘다. 단발머리에 해맑은 미소를 지닌 얼굴, 가늘고 긴 목선, 우아하게 펼쳐진 드레스 그리고 춤추려는 듯 날렵하게 휘어진 팔의 곡선까지 영락없는 여인의 모습이다.

와인오프너는 와인 병에서 코르크를 빼내기 위한 도구다. 와인의 코르크를 열기 위해 나선형의 나사를 코르크 속으로 돌리면서 넣은 다음 지렛대 구조를 활용해 코르크를 당겨 낸다. 이런 기계적 원리를 잘 구현하는 시중의 와인오프너들은 주로 서랍 속에 보관된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멘디니의 안나는 서랍 속보다는 보이는 곳에 장식품으로 진열된다. 이 여인을 서랍 속에 넣으려면 죄책감마저 든다. 너무나 앙증맞아 눈에 잘 띄는 곳에 놓아야 안심이 된다. 보호 본능을 자극하기도 한다.

이 디자인 속에는 사실 은밀한 욕망이 숨겨져 있다.

코르크를 따기 위해 머리부분을 돌리면 옆에 있는 양 팔이 들려 올라간다. 안나가 두 손을 하늘 높이 번쩍 들고 항복하는 듯 하다. 멘디니는 사랑하는 아내를 한 번도 대화에서 이겨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이 와인오프너를 통하여 그 꿈을 살려냈다. 올려진 두 팔을 지그시 눌러 내리면 코르크가 빠져 나온다. 백기를 든 여인을 너그럽게 용서하는 것이 남자의 숨겨진 또 다른 행복이다.

여성들도 어린 시절 갖고 놀던 장난감 인형의 모습을 한 안나를 사랑한다. 하지만 비슷한 처지의 많은 남성들은 내심 순간적 희열을 느끼고 달콤한 상상을 하면서 와인을 즐길 준비를 한다. 멘디니의 유머와 위트에 탄복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막상 이 제품을 써보면 그리 편리하지 않다. 인체공학적으로 별로 좋은 디자인이 아니다. 이보다 훨씬 싸고 단순하지만 편리한 제품이 수도 없이 많다. 그런데도 이 제품은 매력적이다. 5만∼6만 원대로 와인오프너치고는 상당히 비싼 가격이다. 하지만 이런 디자인에 열광하고 수집하는 마니아층이 형성돼 있다. 상상력을 자극하고 은밀한 꿈,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기능이 우선되는 제품은 기능 자체에 충실하고 외형은 그 뒤를 따라야 한다는 개념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디자인이다. 멘디니는 평범한 도구에 꿈과 이야기를 담았고 사용하지 않아도 갖고 싶은 욕구를 자극했다. 디자인이란 그런 것이다. 완벽하게 사랑스러운 디자인은 삶에 재미와 흥미를 더하면서 소비자를 강하게 유혹한다.

박영춘 삼성디자인학교(SADI) 제품디자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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