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종웅 在佛역사학자 밝혀
제1차 세계대전 후 국제질서를 수립하기 위해 1919년 1월 개막한 파리강화회의. 그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4월 13일 상하이에서 수립된 즉시 상하이 신한청년당 대표 김규식(金奎植)을 이 회의에 파견했다. 김규식은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지만 그가 파리에 머무른 약 7개월 동안 무려 180여 개의 프랑스 신문이 한국 문제를 500여 차례나 다뤘다. 김규식은 어떻게 이토록 큰 관심을 끌 수 있었을까.
그 배경에는 한국을 응원한 프랑스 정계와 언론계의 든든한 인맥이 있었다. 이들의 인연은 프랑스 한국친우회(Les Amis de la Cor´ee)로 이어졌고 이후 한국인들에게 유럽에서의 든든한 버팀목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