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난감’에 날밤 새우는 어른들… 키덜트족

  • 입력 2008년 1월 23일 02시 37분


“모형 하나 만드는데 한달 넘게 투자

완성품이 주는 쾌감 잊을수가 없어”

커뮤니티 활발… 회원 3만명 넘는 곳도

“얼마 전 나온 유니콘 건담 정말 멋있더라.” “나는 제2차 세계대전 전투제트기였던 ‘ME 262’를 만들어 보고 싶어.” “연초에 나온 ‘폴크스바겐 골프 GTI’가 굉장하던데….” 초등학교 저학년생들의 대화가 아니다. 30대 남성들의 수다다.

19일 주말 저녁 서울 중구 약수동의 한 건물에서 남성 10여 명이 모여 앉아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다. 테이블 위에는 장난감들이 수북하다. 모형 로봇, 자동차, 탱크. 비행기 등이다.

○ 나는 만든다. 고로 존재한다

이들은 ‘모형 삼합회’ 동호회 회원이다. 각종 모형을 만드는 모임이다. 회원 20여 명은 정기적으로 만나 자신이 만든 모형에 대해 품평회를 연다. 회원 이범철(36·회사원) 씨는 자신이 만든 건담 모형으로 지난해 12월 열린 ‘세계 건담 모형대회(BAKUC)’에 출전해 전체 3위를 차지했다. 이들은 3월 동호회 연합 전시회, 5월 일본 모형 전시회를 준비 중이다.

대중문화 전반에 ‘키드(Kid·아이)’와 ‘어덜트(Adult·어른)’의 합성어인 ‘키덜트(Kidult)족’이 급부상하고 있다. 역시 아이들이 가지고 놀 법한 모형에 빠져 사는 이들도 키덜트 문화의 일부다.

키덜트 문화는 이제 소수 마니아들의 문화가 아니다. 일명 ‘프라모델’로 불리는 모형 로봇, 자동차, 비행기 등을 만드는 성인들을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모형에는 건담 트랜스포머 등 로봇류, 비행기 전함 탱크 등 밀리터리류,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많다. 웹포털 사이트에도 수백 개의 모형 동호회가 활동하고 있다.

건담 모형을 제작하는 반다이코리아의 구자훈 씨는 “건담 로봇의 연매출 규모는 200억 원에 이른다”라며 “매년 30%씩 성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 모형은 ‘예술작품’이다

국내에 약 3만 명의 회원을 가진 프라모델 커뮤니티 ‘건프라 월드’의 운영진 20여 명은 20일 서울 용산 전자랜드 5층에서 작품 전시회를 열었다.

건담 로봇 모형 80여 개가 유리 케이스에 담겨 조명을 받고 있는 가운데 관람객들은 박물관의 그림, 도자기 전시품을 보듯이 모형을 꼼꼼히 감상하고 있다. 자녀의 손을 잡고 온 어른 관객이 많았다.

전시에 참가한 한의사 신성철(35) 씨는 “모형 하나 만드는 데 한 달 넘게 걸리지만 만들고 나면 뿌듯하다”면서 “모형도 하나의 ‘예술작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모형을 만들면 손놀림이 정교해져서 환자 진맥을 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덧붙였다.

모형은 크게 ‘스케일류’와 ‘비(非)스케일류’로 나뉜다. 로봇 등 실제 존재하지 않는 모형은 비스케일류에 속한다. 스케일류는 비행기, 탱크, 자동차 등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일정 비율로 축소한 것이다. 스케일류는 순수 모형과 RC(모터를 사용해 움직이는 모형)로 분류된다. 가격도 천차만별이다. 건담의 경우 HG(1만∼2만 원), MG(3만∼10만 원), PG(10만 원 이상)로 나뉜다. 등급이 올라갈수록 스케일이 커지고 부품이 정교해지며 만들기도 어렵다.

입문자들은 1만∼2만 원대 모형을 구입한 후 부품 다듬기, 접착제 바르기, 조립하기 등 기본 테크닉을 익히는 것이 좋다. 중급자는 비행기, 자동차, 건담 등 한 가지 주제로 3만∼10만 원짜리 모형을 만든다.

고급 단계는 ‘튜닝’을 중시한다. 얇은 플라스틱판을 자르거나 녹여서 각종 형태를 만들어 원래의 모형을 개조한다. 각종 도료로 색깔을 입힌다. 배경을 설정해 하나의 장면을 연출하기도 한다.

○ 아내와 함께 만들어요

‘모형 삼합회’ 회원 김광태(34·반도체 회사 근무) 씨는 “모형을 만드는 과정이 즐겁고, 결과물을 완성했을 때의 쾌감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고 말했다.

‘건프라 월드’ 전시회에 참가한 김태욱(36·자영업) 씨는 “가끔 ‘왜 애들 놀이를 하느냐’는 주위 시선 때문에 힘들기도 하지만 이런 모형들은 아이들은 만들기 어려울 정도로 정교하며 엄연히 성인들이 즐길 수 있는 문화”라고 강조했다.

김 씨는 “지금은 아내와 함께 모형을 만들기도 한다”면서 “아들과 함께 모형 전시회를 찾는 회원이 많다”고 말했다.

이들은 “모형 만들기 취미가 정신적 포만감을 준다”고 말한다.

보험회사에 근무 중인 문상혁(35) 씨는 1970, 80년대 등장했던 로봇들을 모아서 현재까지 400여 개(4000만 원 상당)를 수집했다. 그는 ‘로봇 태권브이’ 복원판 DVD를 즐겨 본다.

문 씨는 “노후생활 보장, 승진, 고액 연봉 등 현실적인 목표를 향해 달리는 것 못지않게 어린 시절의 꿈을 간직하는 것도 중요하다”면서 “언젠가 로봇 박물관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김윤종 기자 zozo@donga.com

▼“상상력-창의력이 쑥쑥… 아이 같다고 놀리지 말아요”▼

‘어른들이 아이들처럼 논다.’

모형 만들기 등 키덜트 문화를 향유하는 사람들은 이런 비난에 익숙하다.

그러나 그들은 키덜트 취미가 상상력과 창의력을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심리학자들은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 좌뇌를 많이 쓰게 되는데 키덜트 활동은 성인이 잘 안 쓰는 우뇌를 자극해 상상력과 창의성을 넓혀 준다”고 말한다.

인간의 좌뇌는 논리적 사고, 분석력 등을 관장하는 반면 우뇌는 공간지각 능력, 예술 감각, 정서 능력, 확산적 사고(상상력)를 담당한다. 보통 7세 이전까지는 주로 우뇌가 발달한다. 이후 나이가 들면서 논리적 사고를 담당하는 좌뇌가 예민하게 발달한다.

모형 만들기 등 키덜트 문화는 성인의 우뇌를 자극해서 뇌 활동이 골고루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예컨대 로봇 태권브이 모형을 조립하는 성인은 정서적으로 아이의 뇌 상태와 비슷하게 변한다. 완성된 태권브이를 세워 놓고 감상하면서 어린 시절 태권브이를 함께 가지고 놀던 친구를 추억하거나 태권브이 만화 줄거리를 상상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우뇌가 자극된다. 우뇌에서 이런 정서적 자극을 받으면 그 자극은 좌뇌로 이동해 현실적인 분석을 통해 구체화되는 과정을 거친다.

인하대 교육대학원 최창호 겸임교수는 “어린 시절처럼 상상력이 뛰어난 시기는 없다”면서 “성인이 된 후 키덜트 문화를 향유하는 과정에서 우뇌가 활성화되면 좋은 아이디어가 생길 확률이 높다”고 말했다.

모형 만들기를 즐기는 사람들은 “모형을 만들다 보면 영화, 음악 등 다른 취미보다 마음이 평안해진다”고 말한다.

어린 시절 경험을 잊지 못하고 그 느낌을 다시 가짐으로써 심리적 안정감을 찾는다. 마음이 안정되면서 불안감이 사라지고 그만큼 상상력이 발휘될 공간도 생기게 된다.

김윤종 기자 zoz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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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롱이의 건프라 리뷰
(www.dalong.net)
최신 건담 모형에 대한 리뷰 사이트
건프라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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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만여 명의 회원으로 구성된 모형 마니아 커뮤니티. 건담 등 전시회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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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크 등 군사 무기 관련 모형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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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리웹 프라모델 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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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담베이스
(www.gundambas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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