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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7년 11월 23일 03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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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격발언 대신 상대방 찬사도
프로기사들이 설화를 입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대부분 기사들은 실제로 만나 보면 말이 거의 없거나 ‘모범답안’ 같은 대답을 내놓는 경우가 많고 한국에서도 역시 겸손이 존경받는 미덕이기 때문이다.
국내 바둑계에서 설화를 가장 많이 입은 기사는 단연 이세돌 9단이다. “실력으론 내가 이창호 9단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모조리 무찔러 버리겠다.”
이 9단이 2000년 32연승을 구가하며 두각을 나타낸 이후 타이틀을 하나씩 딸 때마다 인터뷰 요청이 몰려들었다. 이 9단은 거리낌이 없었다. 패기에 찬 젊은 기사는 특유의 언변으로 속마음을 드러내는 파격적 발언을 쏟아 냈다. 당연히 ‘건방지다’는 말이 그의 이름 앞에 따라 붙는 때가 많았다. 설화뿐 아니다. 행동으로도 그는 파격의 연속이었다.
12세에 입단 직후 갓 입단한 프로기사들이 관례적으로 열 번씩은 맡아야 했던 프로대국의 계시원(초읽기를 불러 주는 사람)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아무리 관행이라도 부당하면 따를 수 없다는 것이었다.
또 3단 시절 세계대회에서 우승한 뒤 그는 승단대회에 나가지 않았다. 세계 대회에서 우승하면 9단이나 다름없는데 3단에서 한 계단씩 승단하려고 대회에 나간다는 것이 앞뒤가 안 맞는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이 밖에 시도별 단체대항전에 예고 없이 불참하는가 하면 불리하지 않은 바둑이지만 그냥 돌을 던지고 나왔다는 의심을 사기도 했다.
바둑 외적으로도 종종 기행을 하기도 했다. 동료들과 하룻밤에 수십 병씩 소주를 먹는 내기를 하기도 하고 한때 골초 소리를 듣기도 했다. 아무도 야생마와 같은 그를 길들일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그를 어릴 때부터 보살펴 온 친형 이상훈 6단은 동생이 저질러놓은 불을 진화하기에 바빴다. 그러나 세월이 약이었을까. 그는 조금씩 변화된 면모를 보이고 있다.
2004년 도요타덴소배 결승에서 창하오 9단에게 2 대 1로 이긴 뒤 “그의 바둑이 나보다 못하지 않다. 그에게 진다고 해서 이상할 것 없다”며 그로서는 이례적 찬사를 보냈다.
○ 스타일 변하자 승률 쑥쑥
올해 파죽지세로 주요 대회를 휩쓸며 승승장구하는 그를 국내는 물론 중국에서도 세계 최강으로 인정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최근 인터뷰에서 “세계 최강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나는 아직 세계 최강이 아니다. 그중 한 명일 뿐이다”라고 나긋하게 대답했다.
그의 바둑도 변하고 있다. 과거에는 먼저 실리를 최대한 확보해 놓고 엷어진 돌을 타개하는 ‘모 아니면 도’ 식 바둑을 뒀다. 그러나 최근 바둑을 보면 실리로 큰 곳보다 두터운 자리를 택하면서 바둑의 전체적 균형을 맞춰 가는 스타일로 변하고 있다. 바둑을 해설하는 프로 기사들은 “예전의 그였다면 상상할 수 없는 바둑”이라고 놀라워한다.
이 같은 기풍의 변화는 그의 바둑에 안정감과 폭넓음을 가져다 줬다. 무리한 행마가 사라지니 승률도 높아졌다.
이를 반영하듯 이 9단은 올해를 최고의 해로 만들며 1인자를 확실히 굳혔다. 지금 기세로 봐선 그의 전성시대가 몇 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바둑은 조화’라고 말했던 우칭위안(吳淸源) 9단의 말을 그가 터득한 것일까. 바둑이나 생활 모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평범한 이치를 깨달은 듯한 그의 앞날이 더욱 궁금해진다.
서정보 기자 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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