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이제는 돌아와 건반 앞에 앉은 그대, 희망의 꽃이여

  • 입력 2007년 11월 22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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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나면 다행입니다. 앞으로 다시는 피아노를 칠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지난해 10월 초 피아니스트 서혜경(47) 씨는 정기 건강검진에서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그해 1월 호암 신년음악회를 시작으로 미국 링컨센터, 플로리다, 일본, 호주 투어를 거쳐 10월에는 독일, 영국에서의 녹음이 예정돼 있던 그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오른쪽 가슴에 생긴 암세포는 이미 겨드랑이 림프샘까지 번져 다른 곳으로 전이될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유방암은 절제수술만 하면 치사율이 가장 낮은 암이지만, 피아니스트로서의 생명에는 치명적이었다. 가슴뿐 아니라 겨드랑이의 림프샘과 어깨의 근육과 신경까지 다 절제해야 하는데 이 경우 다시는 오른손으로 건반을 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 생명이냐, 피아노냐

“피아니스트에겐 사느냐, 죽느냐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요.”

서 씨는 “당장 수술 날짜를 잡자”는 의사의 말도 뿌리쳤다. 암 발병 사실을 알고도 이미 티켓이 매진된 일본 연주(도쿄, 고베, 홋카이도)를 하러 떠났다. 그는 40여 년 동안 하루 평균 6시간 이상을 연습해 왔고, 1년에 30∼40차례 무대에 서면서도 경희대와 뉴욕 맨해튼음악원을 오가며 학생들을 가르치던 불굴의 피아니스트였다.

“이제야 피아노란 악기가 뭔지 알았고, 원하는 소리를 끌어낼 수 있게 됐는데…. 왜 하필 지금 이 순간인가요. 왜 하필 나인가요….”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인정할 수 없던 그는 어떻게 하든 수술을 피하기 위해 대체의학까지 백방으로 수소문을 했다. 올 2월 집으로 찾아갔을 때 그는 항암치료를 받느라 머리카락이 모두 빠지고 병색은 완연했다. 그는 “베토벤도 청각장애를 겪었고, 호세 카레라스도 백혈병, 클라라 하스킬도 뼈와 근육이 붙는 세포경화증을 이겨낸 뒤 더욱 원숙한 음악을 이뤄냈다”며 “나도 반드시 재기하겠다”고 의지를 불태웠다.

그러나 그는 ‘생존이냐, 피아노냐’는 갈림길에서 깊은 우울증에 빠져 버렸다. 마침내 4월 20일 그의 오래된 팬이자 피아니스트의 처지를 충분히 이해하는 노동영 서울대 교수에게 수술을 받기로 결정했다. 수술실에서 늘 서 씨의 음반을 즐겨 들어 왔던 노 교수는 피아니스트에게 필요한 신경과 근육조직은 모두 남겨 두고 암세포만 제거하는 초정밀 수술을 진행했다. 이를 위해 디스크나 뇌수술에만 이용하는 ‘신경자극기’(신경을 건드릴 경우 경고를 보내는 장치)도 동원됐다. 시간과의 싸움도 중요했다. 전신마취 시간이 길어지면 기억력이 악화돼 악보를 외울 수 없기 때문이다. 수술은 2시간 만에 성공적으로 끝났다.


▲ 촬영 : 전승훈 기자

○ 재기의 희망, 뱃노래

수술 다음 날 서 씨는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저 수술 받았어요. 그런데 피아노가 쳐지네요. 한번 들어 볼래요?”

전화기 너머로 서 씨는 흐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뒤 오펜바흐의 오페라 ‘호프만 이야기’에 나오는 ‘뱃노래’(아름다운 밤)의 선율이 흘러나왔다. 보석처럼 투명하면서도 불꽃의 정열이 담긴 서 씨 특유의 피아노 소리였다. 수술 이후에도 그는 두 달간 33번의 방사선 치료를 받으며 또다시 우울증에 빠져 들었지만, 차분히 운전면허시험을 준비하면서 정신을 차리고 일어섰다.

서 씨는 1980년 세계적 권위의 이탈리아 부소니 콩쿠르에서 동양인 최초로 우승한 뒤 1983년 뮌헨 콩쿠르에서 1위 없는 2위, 1988년 카네기홀이 선정한 ‘올해의 세계 3대 피아니스트’로 선정된 바 있다.

노 교수는 “현재 암세포는 모두 제거됐으며, 재발 방지 관리를 하면서 피아노도 칠 수 있다”고 밝혔다. 서 씨는 내년 1월 22일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KBS교향악단과 함께 KBS신년음악회(1577-5266)에서 재기무대를 갖는다. 또 내년 9월 영국 런던심포니와 함께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 전곡을 녹음할 예정이다.

“피아노를 다시 치고 싶다는 희망에 제가 살아남았습니다. 예전에는 남에게 인정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피아노를 쳤습니다. 그러나 이젠 음악이 도전과 정복의 대상이 아니란 것을 알았어요. 제가 음악 속에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가을 단풍이 완연한 경희대 캠퍼스에서 만난 서 씨는 어느덧 인생을 관조하는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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