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하루종일 말이 필요없다…디지털 무언족<無言族>

  • 입력 2007년 10월 5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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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그랬던가. 한국을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고. 구한말(舊韓末) 동북아의 작은 나라 한국이 세상의 관심권 밖이었을 때 이 말은 ‘은둔의 나라’라는 뜻이 강했다. 이제 교역 규모 12위권인 한국은 더 이상 은둔 국가가 아니다.

하지만 요즘 한국의 젊은이들은 고요한 나라에 살고 있다. 삶이 점차 조용해지고 있다. 사람들과 직접 이야기를 나누기보다는 휴대전화기 문자메시지, e메일과 인터넷 채팅, 메신저 등 디지털 기기로 의사소통을 하며 ‘은둔’한다.

친구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직장에서도 메신저로 동료들과 대화한다. 출퇴근길에는 아이팟으로 미국 드라마를 보고, 집에서는 인터넷 게임을 하다 보니 목청을 울리며 소리를 내는 시간이 크게 줄었다. 디지털 기기로 무장한 ‘디지털 무언(無言)족’에게 목소리는 과거의 유물 취급을 받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한국 젊은이들은 하루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디지털 무언족으로 살고 있을까. 삼성전자 디지털 AV사업부 조휘상(28) 씨의 하루를 들여다보자.》


촬영: 박영대 기자

#AM 06:00

“삑삑∼.” 휴대전화기 알람 소리에 눈을 뜬다. 눈을 비비고 일어나 노트북PC 켜기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이다. e메일을 점검하고 구글 캘린더에 적힌 하루의 일과를 확인한다.

출근 직전인 오전 7시 반이 가장 기다려진다. 어제의 펀드 투자 결과와 잔고를 알려주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가입한 인터넷 재테크 동호회 ‘딸기아빠의 재무설계/펀드 이야기’에 어젯밤 남긴 글에 20개의 댓글이 달렸다. 제법 좋은 반응이다.

퇴근할 때 볼 영화 ‘시간을 달리는 소녀’와 요즘 재미있게 보고 있는 TV 오락 프로그램 ‘무한도전’을 휴대용 동영상 플레이어(PMP)에 내려 받는다. 출퇴근할 때 보는 터라 진지하거나 난해한 프로그램보다는 가볍게 즐길 수 있는 동영상을 주로 담는다.

아차, 부모님에게 문자메시지 보내는 걸 깜빡했다. 부모님도 이젠 직접 목소리를 듣기보다는 간편한 문자메시지를 더 좋아하신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라고 부모님께 보내니 바로 답장이 온다. ‘그래 우리 사랑하는 아들 오늘도 잘 보내라∼♡.’

하트 모양의 이모티콘을 보내시다니… 부모님도 완전 신세대시다.

#AM 08:30

회사에 도착. 사내 메신저에 접속해 친한 동료들에게 ‘하이∼’ 출근 인사 메시지를 보내고 10분간 부서 동료들과 모여 직접 이야기를 나눈다. 디지털 무언족이 늘어나자 대면접촉 시간을 늘려 의사소통을 더욱 원활하게 만들려는 회사의 방침이다. 사내에서 자유롭게 큰 소리로 대화하는 유일한 시간이다.

“어제 저 미술관 다녀왔어요” “과장님은 토요일에 출근하셨죠?” “경락마사지 받았는데 아팠어” 등의 자유로운 대화가 오간 직후 업무가 시작됐다. 사무실은 침묵에 잠긴다.

30분 뒤 모니터에 부장의 메시지가 떴다. ‘09:30 1회의실 라인업 회의. 참석 예정’ 사내 회의실 예약 시스템에 이미 참석자 이름이 올라와 있다.

글=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

디자인=김성훈 기자 ksh97@donga.com

#PM 12:00

밥 먹기로 약속한 동료에게 메신저로 말을 걸었다. “자리에 없음? 10분 후 6층에서 봐.” 식당 앞 액정표시장치(LCD) 모니터에는 오늘의 메뉴 세 가지가 소개돼 있다.

머리를 식히고 싶을 땐 MP3플레이어를 벗 삼아 혼자 밥을 먹기도 한다. 밥을 먹은 후엔 빨리 돌아와야 한다. 얼마 전부터 시작한 닌텐도DS의 강아지 육성 게임 ‘닌텐독스’에서 기르는 강아지 ‘소세지’에게 밥을 줘야 하기 때문이다. 비록 게임기 속 강아지이지만 보고 싶을 때 언제든 볼 수 있어서 간편하다. 그런데 이 녀석, 얼굴이 해쓱해 보인다. 요새 업무가 많아서 제때 밥을 챙겨 주지 않아 그런가 보다. 밥을 먹이고 터치스크린으로 ‘소세지’를 몇 번 쓰다듬으니 점심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PM 04:00

e메일 한 통이 날아왔다. ‘결재가 완료됐습니다.’ 어제 러시아 모스크바로 출장 간 차장님이 현지 결재를 한 것. 전자결재라 시간, 분, 초까지 상세한 시간이 기록된다. 과거처럼 일일이 상사를 찾아다니지 않고 ‘병렬 결재’ 시스템을 이용해 여러 명의 상사에게 동시에 서류를 상신할 수 있다. 문서가 반려되는 것도 조용하다. ‘내용이 정확하지 않습니다’ 등의 사유가 중간 결재자와 상신자에게 e메일로 동시에 전달된다. 빨라서 편하기는 하지만 무섭다.

갑자기 목이 말랐다. 마음 같아선 “차 한 잔 하러 가실 분”이라며 소리치고 싶은데 모두들 말없이 일에 열중하고 있다. 바로 옆에 앉은 대리에게 메신저로 물었다. ‘ㄱㄱ?’(차 한 잔 하러 고고?) 그러자 옆 대리로부터 메시지가 날아왔다. ‘ㅇㅇ’(응)

또래 동료나 선후배와 메신저를 할 때는 최대한 간략하게 한다. 말로 하지 않아도 되니까 자음 모음만으로도 뜻이 통한다. 메신저의 큰 매력이다. 다른 사람에게 신경 쓰지 않고 둘이만 얘기할 수 있어 말보다 편리하다.

다른 부서에 있는 외국인 동료가 곁을 지나치며 한마디 던진다. “여기는 도서관 같아….”

#PM 08:00

퇴근길 지친 몸을 이끌고 회사 문을 나설 때 손엔 이미 PMP가 쥐여 있다. 아침에 내려받은 영화 또는 TV 프로그램을 보거나 MP3플레이어로 음악을 듣는다. 아는 사람과 인사를 하는 등 방해받기 싫어서 느리게 걷거나 퇴근 무리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걸었다.

집으로 오는 길에 커피숍에 들러 인적이 드문 자리에 앉았다.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 이 순간만은 주변이 시끄러워도 날 방해하는 사람은 없다. 퇴근길 조용히 책을 읽고 싶을 때나 하루 종일 일에 치였을 때 커피숍에 들러 혼자서 하루를 정리한다.

노트북을 꺼내 인터넷 서점에 접속해 읽고 싶은 책 몇 권을 고르다 낮에 깜빡했던 휴대전화 요금을 온라인으로 송금했다. 한 시간 정도 머물다 가면 어느새 퇴근 인파는 사라진다. 사람들 사이에서 치열하게 살지만 이때는 한 박자 쉬어 가는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든다.

#PM 11:00

자기 전 ‘웹플레이어’란 아이디로 MSN에 접속했다. ‘마음이 쓸쓸하다’는 친구 아이디가 보인다. 그 순간 함께 접속한 재테크 동호회 채팅방에서 온라인 친구들이 내게 “휘쌍님”이라며 말을 걸었다. 온라인상에서 재산, 투자액, 그간 얻은 수익 등 개인 포트폴리오를 공개한 터라 서로의 경제력을 낱낱이 아는 사이. 나도 며칠 전 내 포트폴리오를 공개했고 “내년에 중국 쪽에 투자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들과 오프라인으로 직접 만나 얘기하고 싶지는 않다. 거리낌 없이 재산을 공개했고 서로 조언을 아끼지 않는 사이지만 아이디로만 아는 관계다. 나이, 외모, 직업은 모른다. 그래서 서로에게 더 솔직하다. 나뿐만 아니라 이 동호회 회원들 모두 오프라인 만남은 피하고 있다. 선입견 없는 의사소통. ‘채팅’의 장점이다.

채팅이 무르익자 내 손은 점차 빨라졌다. 시계를 보니 벌써 밤 12시. 아차, ‘소세지’한테 잘 자라고 인사하는 걸 잊었다. 닌텐도DS 전원을 켜고 강아지 ‘소세지’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 줬다. 뉴에이지 피아노 연주곡을 틀어놓고 자리에 누우니 하루가 끝. 오늘도 무지 피곤하다. 손가락이 아프다. ‘말 아닌 말’을 너무 많이 한 탓일까? 불현듯 궁금했다. 나를 생각해 주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소세지’는 알까?

글=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

사진=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디지털 무언족:

주로 문자메시지, e메일 등 디지털 기기의 의사소통 기능을 활용해 목소리를 사용하지 않고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 이들은 불가피할 때만 목청을 울리기 때문에 말하는 시간은 갈수록 줄어든다. 디지털 무언 커뮤니케이션은 젊은이를 중심으로 크게 확산되고 있지만 중장년층도 무언의 세계에 빠지는 시간이 점차 늘고 있다.

40대까지 회사서 몇마디만 던지고 ‘끝’

▼무언족, 얼마나 확산되고 있나▼

회사 근처 원룸에서 혼자 사는 조 씨가 하루에 만나는 사람은 대략 10명. 하루 동안 직접 말하는 시간은 1∼2시간 정도다. 사내 회의나 거래처 관계자와의 통화 등 업무와 관계된 일이 전부다. 개인적 의사소통은 대부분 디지털 기기를 통해서 하고 퇴근 후 역시 휴대용 멀티미디어 플레이어(PMP)나 MP3플레이어 등으로 시간을 보낸다. ‘대화를 하되 말은 하지 않는’ 이러한 현상은 20, 30대 젊은 직장인에게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40대인 한국관광공사 정보시스템 운영팀의 김경태 과장도 디지털무언족 중 한 명이다. 업무상 하루에도 여러 명과 대화해야 하는 김 과장은 대부분의 의사소통을 문자메시지나 e메일로 처리한다. 김 과장은 “직접 만날 필요 없이 서로 필요한 사항들만 확인하니 일 처리 속도가 빨라졌고 시간적 여유가 생겨 더 많은 업무를 할 수 있다”고 얘기했다.

말을 하지 않아 인간관계가 더 돈독해진 사례도 있다. 정보기술(IT)업체인 ‘신흥산업’의 김정택(46) 상무는 최근 인터넷 메신저로 사원들의 고민 상담을 해 주고 있다. 하루에 사원들에게 직접 말을 하는 시간은 30분도 안 된다. 업무와 관계된 사항부터 결혼, 육아 문제 등 개인적인 고민까지 온라인상에서 얘기를 나눈다는 김 상무는 “얼굴을 보지 않고 얘기할 수 있어서 사원들이 부담을 덜 느끼는 것 같다”고 말했다.

서강대 전상진(사회학) 교수는 “디지털무언족은 언어를 의사소통의 수단이 아니라 자신을 나타내는 표현 수단으로 여긴다”고 분석했다. 디지털상에서 이뤄지는 대화는 쌍방향성이 아니라 일방향성이 되기 십상이다. 이들은 ‘내 할 말은 이것’이라는 식으로 문자로 이야기를 던져 놓을 뿐이다. ‘나는 할 말을 다 했다’는 식으로 행동하면서 책임을 지지 않는 개인주의적 대화법이 지배적이라는 게 전 교수의 분석이다. 목청을 울리는 아날로그 대화가 서로를 잇는 ‘선’과 같다면 디지털무언족의 문자 대화는 수많은 ‘점’들이 불연속적으로 퍼져 있는 형태와 비슷하다. 이 때문에 짧은 시간에 효율적으로 대량 의사소통이 가능하며 이를 즐기기도 하지만 ‘군중 속의 고독’을 느낄 개연성도 커진다.

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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