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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7년 9월 1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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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가 아마도 작년 봄이었지요. 당신은 드라마 작가를 꿈꾸는 20대 후반의 건강한 아기 엄마였습니다. 그때 정현 씨는 저에게 “좋은 드라마를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라는 어려운 질문을 하셨습니다. 전 지금도 그 순간을 생각하면 괜히 부끄러워집니다. 왜냐하면 저 역시 정현 씨가 한 질문을 계속 고민해야 할 처지이지 그 답을 말해 줄 처지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그때 제가 정현 씨한테 한 대답은 좋은 책을 읽으라는 것과 끊임없이 쓰고 또 쓰라는, 지금 생각해 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뻔한 조언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변명 같지만 그땐 그것만이 제가 제 경험을 통해서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답이었으니까요.
정현 씨.
저도 당신처럼 막막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 길이 과연 내 길인가’ ‘내가 헛된 망상에 사로잡혀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으로 방황하던 시절에 힘이 되어 준 책이 있었습니다. 바로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라는 프랑스 작가의 소설 ‘하드리아누스의 회상록’입니다.
하드리아누스라는 로마 황제가 죽음을 눈앞에 두고 말 그대로 자신의 지난 시간을 회상하는 형식으로 쓴 1인칭 소설입니다. 하지만 사실 저는 이 소설보다 이 소설의 뒤에 부록처럼 붙어 있는 ‘작가 노트’를 더 좋아합니다. 그 작가 노트에는 이 작품을 구상하던 최초의 시간에서 결국 이 작품을 완성하기까지의 긴 여정이 간략한 메모 형식으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유르스나르는 이 소설의 첫 구상을 20세의 나이에 합니다. 하지만 이 소설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되기까지는 27년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27년 동안 작가는 이 소설을 쓰다가 중도에 포기하고 다른 일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유르스나르는 결국 이 소설을 쓰게 되는 것에 이상한 운명 같은 것을 느끼고 묵묵히 계속 써 나갑니다. 그리고 드디어 27년 만에 이 소설을 완성하게 되면서 위대한 작가의 반열에 오릅니다.
저는 지금도 일이 잘 안 풀려서 괜스레 마음이 조급해지고 불안해질 땐 이 작가 노트를 꺼내 두서없이 읽곤 합니다. 그러면서 헝클어진 마음을 다시 다독이곤 한답니다.
생각난 김에 ‘화가의 잔인한 손’이라는 책도 소개합니다. 미셸 아생보라는 작가가 20세기의 대표적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을 인터뷰한 대담집입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베이컨의 입에서 전해지는 생생하고 담담한 어조를 통해 정현 씨에게 지금 필요한 힘이 무엇인지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 두 권의 책이 좋은 드라마를 쓰는 것에는 별 도움을 주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정현 씨에게 좋은 선생님이 되어 줄 거라고 자신합니다.
정현 씨.
아기는 많이 컸는지, 또 잘 지내는지 궁금합니다.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그 열정을 잃지 말고 건필하세요. 저도 겸손한 마음을 잃지 않고 계속 정진하겠습니다.
From: 김은희 <드라마 ‘겨울 연가’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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