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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6년 12월 5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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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일기장이 저 사람들한테 넘어가면 우리 가족은 참말로 몰살당한다”는 어머니의 엄포에 소년은 불타는 일기장을 지켜봐야만 했다. 이 소년이 바로 1948년부터 55년간 써 온 일기 98권을 최근 국립민속박물관(관장 신광섭)에 기증한 박래욱(68) 씨다.
일기장을 태웠음에도 박 씨의 부모는 결국 북한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경찰공무원으로 부통령의 경호원을 지냈던 박 씨의 아버지가 ‘반동분자’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뒤에도 박 씨의 기록은 계속됐다.
“부모님의 죽음이 저에겐 평생 한이 됐어요. 일기를 쓸 수가 없는 상황이었지만 조금씩이라도 메모를 했어요. 전쟁이 끝나면 내가 겪은 것을 모두 기록으로 남기려고….”
얼마나 꼼꼼하게 기록했는지 날짜별 사건 외에 날씨도 상세하게 남아 있다.
‘1950년 8월 25일 금요일 맑음. 분주소에서 유격대라는 사람들이 왔다. 반동분자의 가산을 몰수하여 위대한 수령 동지의 사업에 써야 한다고 했다. 지난번에도 가산을 몰수해갔는데 그때는 식량만 분주소로 가져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옷과 살림살이 일체를 가져갔다.’
박 씨가 처음 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당시 어머니가 그에게 ‘남아(男兒) 10세면 인생에 흔적을 남기라’고 권유한 것이 계기가 됐다. 그때부터 쓰기 시작한 일기는 55년간 이어졌고 기록하는 습관은 생활의 모든 분야로 확대됐다. 일기장 외에도 1961년부터 2003년까지 약방 금전출납부 10권, 1971년부터 2001년까지 한약처방전 16권, 도민증(1962년), 국민병역신고증(1961년), 인감증명원(1965년), 예금통장, 상품영수증 등도 박 씨가 기증한 자료들이다.
서울 광진구 자양동에서 한의원을 하는 박 씨는 “첫 환자의 처방전부터 하나도 빼놓지 않고 기록했다”고 말했다. 박 씨의 일기는 1997년 최장기간 기록으로 한국기네스인증서를 획득했다.
이런 박 씨의 기록은 수량경제사 자료로 활용될 전망이다. 1956년 돼지고기 반근 100환, 목욕 50환, 영화관람료 30환, 신문대금 300환 등 자세한 기록은 과거의 경제 상황을 헤아리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민속박물관은 4일 이들 자료에 대한 체계적인 정리를 마친 뒤 자료집으로 펴낼 예정이라고 밝혔다.
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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