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재기자의 무비홀릭]‘가을로’에 나타난 사랑의 전이현상

  • 입력 2006년 10월 19일 02시 5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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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사를 초월한 불멸의 사랑. 이는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인 ‘가을로’(10월 26일 개봉)를 연출한 김대승 감독의 화두이기도 하다. 결혼을 눈앞에 둔 남자(유지태)가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로 연인(김지수)을 잃고 방황하다 그녀와 똑같은 말과 행동을 하는 또 다른 여인(엄지원)과 마주치면서 겪는 복잡한 감정을 옮긴 ‘가을로’. 이 영화는 사랑하는 여자와 사별한 남자 교사가 그녀와 너무도 흡사한 언행을 반복하는 남자 제자에게 빠져든다는 내용을 담은 김 감독의 전작 ‘번지점프를 하다’의 연장선상에 있다.

궁금하다. 그녀와 닮은 또 다른 여자(혹은 남자)에게 이끌리는 남자들의 심리. 이건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일까, 아니면 남정네들의 서푼어치 수작에 불과한 것일까. 영원한 사랑의 존재를 믿는 고려제일신경정신과 김진세(한국메조테라피연구회장) 원장과 운명적인 사랑을 절대 믿지 않는 기자가 ‘가을로’ 속의 남자 심리를 두고 이야기를 나눴다.

기자=“한때 사랑했던 여성과 너무도 닮았다”면서 접근하는 건 남자들이 흔히 쓰는 ‘작업법’입니다. 유지태도 이젠 그리움에서 벗어나 새 여자를 만나고 싶은 욕망이 무의식 속에 있었던 게 아닐까요? 그런 무의식이 그로 하여금 김지수와 몇 가지 동일한 특징을 보이는 엄지원을 ‘운명의 여자’로 착각하게 만듦으로써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원장=너무 어렵게 보는군요. 때론 단순하게 접근할 때 본질이 보입니다. 일종의 전이(transference) 현상입니다. 과거 자신의 정서에 지대한 영향을 준 사람과 비슷한 특징을 가진 또 다른 사람을 과거의 사람과 동일시하는 현상이죠.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사람이 아버지가 즐겨 입던 빨간 외투를 입은 다른 사람을 보면 이유 없이 적개심을 품는 것과 같은 현상입니다. 정신적인 상처라고 볼 수 있죠.

기자=센티멘털한 체하는 남자가 저는 제일 싫습니다. 여자들이 걸려들기만 호시탐탐 노리면서도 겉으론 유지태처럼 이 세상 슬픈 표정은 다 짓죠. 아무리 과거의 여자와 비슷한 말을 하는 여자라도 만약 그 여자가 엄지원처럼 예쁜 게 아니라 ○○○처럼 우락부락하고 못생긴 여자라면, 그래도 유지태는 ‘아, 나의 운명의 여인이야’라는 생각을 품게 될까요?

원장=전이 현상을 분명히 이해해야 합니다. ‘각인된 일부만으로도 전부로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유지태가 우연히 만난 운명의 여자가 실제로 엄지원이 아닌 ○○○처럼 생겼을지라도, 유지태 눈에는 그 여자가 엄지원처럼 예쁘게 보일 거란 얘깁니다.

기자=눈에 콩깍지가 씐 거군요.

원장=게다가 영화는 영화니까, 관객을 위해서나 이 기자님을 위해서나 예쁜 배우를 쓸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기자=만약 유지태와 엄지원이 사랑에 빠져 결혼하게 된다면 그들의 미래는 어떨까요? 혹시 여자가 “나를 진정 사랑한 게 아니라 나를 통해 과거 여자를 사랑할 뿐”이라면서 부부싸움을 하진 않을까요?

원장=정확하게 보았습니다. 결혼에는 신경증적인 동기(neurotic motive)가 있게 마련입니다. 예를 들어 무서운 아빠 밑에서 공포에 떨고 자란 딸의 경우 아주 부드러운 남자와 결혼하거나, 아니면 아빠와 너무나 똑같은 남자와 결혼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유지태는 ‘김지수의 그림자’인 엄지원을 사랑한다는 감정에 빠져 있을 때 행복을 느끼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행복한 결혼을 위해서는 유지태가 엄지원을 존재하는 그대로 이해하면서 그녀에 대한 ‘새로운 사랑’에 빠지기를 권합니다. 평소 ‘김지수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엄지원의 면모 중에서도 알고 보면 더 좋은 ‘엄지원만의 무언가’를 찾아낼 수 있으니까요.

기자=아하, 두 여자와 사는 법을 익히는 거군요.

이승재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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