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정은령]골목길 접어들 때에

  • 입력 2006년 10월 14일 03시 03분


골목은 그저 통로가 아니었다. 그 골목의 사람들이 오며 가며 모이는 작은 광장이자, 집 마당을 확장한 작업장이자 무엇보다도 아이들에겐 놀이터였다.

유년 시절을 보낸 서울 변두리 동네는 6·25전쟁 이후에야 사람들이 몰려 살기 시작한 곳이라 내력 있는 고택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지어진 지 20년 안팎의 ‘개량한옥’들과 ‘집장사 집’이라고 불리던 단층 양옥들이 잇닿거나 마주보며 골목을 만들었다.

골목의 담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나 ‘술래잡기’를 하는 아이들에게는 술래 판이었다. 늦여름이면 폴싹거리고 뛰어다니는 아이들은 골목 안 친구의 어머니나 할머니들에게 “고추 밟는다”고 지청구를 듣기 십상이었다. 집집마다 제집 마당도 부족해 골목에 자리를 펴고 김장 때 쓸 고추를 말리던 그즈음, 골목의 ‘점령군’은 금빛 나는 붉은 고추였다.

골목으로 창문이 난 방에는 다 큰 딸들을 재우지 않는 법이었다. 사람들 발걸음이 뜸해진 밤이면 그 창문 있는 방의 임자인 여학생에게 마음을 뺏긴 숫기 없는 소년들이 종종 작은 돌 같은 걸 던지기도 했다. “어떤 놈이냐” 우레 같은 이웃집 아저씨 고함소리에 연이어 들리던 달음박질치는 발소리….

“골목길 접어들 때에/내 가슴은 뛰고 있었지/커튼이 드리워진 너의 창문을/말없이 바라보았지….” 세상 떠난 가수 김현식이 노래했던 ‘골목길’은 그런 풍경이리라.

누구네 집 밥숟가락이 몇 개인지, 뉘 집에서 오늘 밤 반찬으로 무엇을 먹었는지까지 알게 되는 근접성은 때로 이웃 간에 없어도 좋을 시비를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옆집에서 사람이 죽어 나가도 몇 달씩 모르는 일 같은 건 벌어지지 않았다.

11일 서울시정개발연구원은 ‘서울시한옥주거지 보전’ 정책토론회를 열었다. 서울에 아직 한옥이 2만여 채 남아 있다는 통계보다 더 오래 시선을 끌어당긴 것은 자료로 제시된 한옥집단주거지 골목의 풍경이었다. 조선시대부터 성 안이었던 동네 말고 용두동이나 제기동처럼 일제강점기에 집단주거지로 택지개발된 마을까지, 수십 채의 한옥이 모여 있는 골목은 여전히 서울 안에 있다.

이 한옥주거지를 박물관에 보존하는 것이 아닌 사람들이 살아가는 ‘역사경관’으로 보존하자는 게 일단의 제안이다. 2001년부터 서울 삼청동 가회동 일대의 한옥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온 ‘북촌한옥마을’의 경우처럼 한옥 개보수에 지원금을 주는 방식이 제시된다. 주민들이 동의하면 한옥주거지를 무리하게 뉴타운으로 바꾸지 않는 ‘주민협정’도 검토되고 있다.

그러나 ‘북촌’의 6년간 실험이 생각하게 하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다.

북촌 사람들은 집 앞마다 차를 대서 골목을 없애는 대신 인근 공공도서관 지하에 지어질 주차장을 공동 이용할 계획이라고 한다. 처마가 잇닿은 동네의 좁은 골목은 아이들이 뛰어노는 놀이터로, 이웃과 대문을 열고 소통하는 ‘커뮤니티 공간’으로 남겨지게 된다.

태어난 이래 줄곧 아파트단지에서만 살아온 두 아이에게 골목의 뜻을 물었다. 열 살인 큰아이는 “건물들 사이에 있는 외진 곳”이라고 하고 아홉 살인 둘째는 “큰길 말고 작은 길”이라고 했다.

내 아이들은 이 다음에 골목길 접어들 때 왜 가슴이 뛰는지 알게 될까.

정은령 사회부 차장 r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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