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만은 프로… 연주할땐 세상이 다 내것”

  • 입력 2006년 6월 19일 03시 05분


코멘트
#1. 불혹의 나이를 넘긴 직장인 김태빈(42) 씨. 아들뻘 되는 대학생 밴드 ‘A&B’의 연주 실력을 보며 불안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의 순서를 마친 뒤에도 자리를 뜨지 못한 채 연방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아, 정말 너무 잘하는 거 아냐? 나도 어릴 때부터 계속했으면 잘했을 텐데….”

17일 오후 2시 서울 마포구 합정동의 한 스튜디오. 제1회 전국 아마추어 밴드 경연대회 2차 예선이 있는 날이었다. 김 씨 역시 6인조 밴드 ‘사상최악’을 이끌고 참가했다. 젊은이들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 오랜만에 쫄티와 청바지도 꺼내 입었다. 그가 이끈 ‘사상최악’은 40세 주부, 38세 학원 강사 등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386 밴드. 그가 출전한 이유는 단 하나, ‘즐거움’ 때문이다.

“대회를 위해 연습하면서 내가 살아 있다는 걸 느꼈어요. 일주일에 한 번 만나는 것도 힘들지만 그 시간만은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죠. 백발이 성성할 때까지 연주하며 폼 나게 살아 보고 싶습니다.”

#2. 중학교 2학년생 한지수(14) 양. 그는 이번 대회 최연소 출전자로 이미 유명해졌다. 덩치 큰 기타를 들고 연주하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으나 표정만은 진지했다. 한 양이 속한 ‘WNA밴드’는 10, 20대 초반 학생으로 이루어진 최연소 밴드. ‘동방신기’에 열광할 나이지만 한 양은 “기타가 가장 친한 친구”라고 말한다.

“아버지도 어릴 적부터 기타를 연주하셨죠. 친구들은 밴드 활동을 하는 날 특이하게 보지만 난 그저 좋아하는 음악을 할 뿐이에요.”

이번 대회는 순수 아마추어 밴드를 위해 마련된 자리다. 730개 참가 팀 중 60팀이 1차 예선에 진출했고 이 중에서 30팀이 추려졌다. 청소년부터 중년층, 외국인 등 참가자들의 연령, 인종, 직업도 다양했다.

이 대회를 주관한 김장섭(42) 씨는 과거 현대전자(현 하이닉스반도체) 근무 시절 사내 아마추어 직장인 밴드를 만들어 활동했다. 그는 “1984년 잠실 학생체육관에서 전국 대학 보컬 경연대회가 열렸는데 그 뒤 아마추어 밴드를 위한 대회가 없어 사비 8000만 원을 들여 이번 대회를 열게 됐다”며 “앞으로 매년 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2차 예선에 참가한 30팀 중 15팀은 다음 달 1일 오후 3시 마포구 서교동 클럽 롤링홀에서 열리는 본선 무대에 오른다.

이날 참가한 밴드들은 아마추어답게 꿈도 소박했다. ‘알바트로스’의 보컬 조영민(44) 씨는 “고교 시절 이후 20년 만에 밴드를 다시 결성했는데 매주 연습이 있는 금요일만 손꼽아 기다릴 정도로 즐겁다”고 말했다. 영어 강사 출신의 외국인 밴드 ‘더 포티 데이스’의 크레이그 브랜치(36·스코틀랜드) 씨는 “멤버들이 멀리 떨어져 살지만 연습한다고 하면 즉시 달려올 정도로 단합이 잘된다”고 말했다. 참가자들에게는 음반 100만 장 판매나 가요 순위 1위 같은 상업적 목표는 애초부터 없었다.

5시간 동안 계속된 2차 예선의 마지막 순서는 9인조 밴드 ‘잼’이 장식했다. 고3 수험생인 멤버 조아라(18) 양은 연주 직전에 ‘출전 의의’를 이렇게 또박또박 밝혀 박수를 받았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음악으로 하나가 된다는 게 즐겁잖아요. 각각의 연주가 어우러져 멋진 음악이 탄생하는 것만큼 매력적인 건 없더라고요. 아직 실력은 부족하지만 상관없어요. 우리는 아마추어니까요.”

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