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는 우리 역사 中에 뺏길순 없죠”

  • 입력 2006년 2월 7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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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구 기자
이훈구 기자
국내의 대표적 고구려사 연구 민간 학술단체인 고구려연구회의 신임 회장에 발해사 연구의 권위자인 한규철(51·사진) 경성대 교수가 취임했다. 한 교수는 발해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첫 학자로 송기호 서울대 교수와 함께 국내 발해사 연구의 양대 견인차로 꼽힌다.

올해로 창립 12년을 맞는 고구려연구회는 활발한 현장 활동을 펼쳐온 초대 회장 서길수(62) 서경대 교수가 재작년 물러난 뒤 동아시아 교섭사를 전공한 서영수(57) 단국대 교수가 2대 회장을 맡아 이론작업을 강화해 왔다.

그런 고구려연구회에서 한 교수에게 3대 회장직을 넘긴 것은 세대교체의 필요성과 함께 발해사를 중국사로 재편하려는 중국의 시도에 맞서기 위해서다. 중국은 헤이룽장(黑龍江) 성 닝안(寧安) 시의 상경성 등 발해유적을 2008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려 하고 있다. 1일 회장에 취임한 한 교수를 만났다.

“우리학계에서조차 고구려는 몰라도 발해까지 우리 역사로 주장할 수는 없다는 인식이 일부에 있습니다. 이는 고구려와 발해의 관계를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고구려와 발해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지닌 나라입니다.”

흔히 국명만 떠올려 고려만이 고구려의 후예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고구려 멸망 뒤 정확히 30년 만에 건국된 발해야말로 고구려의 정통 계승국임을 자부했었다. 고려는 고구려 멸망 후 250년 뒤에 건국됐다. 고려 건국 전에 편찬된 ‘속일본후기’에 발해국왕을 고려(고구려) 국왕으로 칭한 기록이나, ‘발해말갈 대조영은 고려(고구려)의 별종’이라는 ‘구당서’(중국의 역사서)의 기록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

한 교수는 “발해의 건축 유적에 한민족 특유의 온돌과 돌무덤, 돌성이 등장하는 문화적 계승성과 발해 멸망 후 발해 왕손들이 고려 태조 때 귀화해 협계 태(太)씨, 영순 태씨의 시조가 됐다는 족보의 기록도 발해가 우리민족사의 하나임을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해사를 한국사로 바라보지 않는 것은 ‘지배층 고구려인, 피지배층 말갈인’이라는 고정된 인식 때문이라고 한 교수는 분석한다.

“발해의 영토는 대부분 고구려의 영토인데 거기 살던 주민 대다수가 고구려인에서 불과 30년 만에 말갈인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옛 사서들에 나오는 ‘말갈’이란 표현은 중국의 동북방 이민족에 대한 중국인들의 통칭이었을 뿐입니다. 오늘날의 만주족으로 이어진 종족명으로서의 ‘말갈족’과는 다릅니다. 그 말갈족은 헤이룽 강 일대의 흑수말갈에만 해당됩니다.”

따라서 교과서 기술부터 지배층과 피지배층 모두를 고구려인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 한 교수의 지론이다.

“올해는 발해의 해가 될 것입니다. 8월에는 KBS에서 대조영을 주인공으로 하는 주말드라마를 방영합니다. 10월에는 고구려연구회에서 발해사를 주제로 대규모 학술대회를 개최할 것입니다. 민족주의나 국수주의에 사로잡혀 흥분하기보다는 고구려와 발해의 관계를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알려는 노력이 필요한 때입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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