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새의 노래’…비정한 전쟁…뜨거운 사랑…긴 여운

  • 입력 2005년 9월 3일 03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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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의 노래/시배스천 폭스 지음·황보석 옮김/686쪽·1만2000원·열린책들

영국인 청년 스티븐 레이스퍼드는 큰 키에 검은 머리, 끈기 있고 강렬해 보이는 눈동자를 가졌다. 담배 케이스를 재킷에 넣고 다니며, 중학교 때부터 라틴어와 그리스어로 된 암호를 사용해서 자신이 관찰한 사람들의 특징을 공책에 적고 있는 인물이다.

그가 1910년 섬유산업을 배우러 프랑스의 작은 도시를 방문했을 때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새로운 선진 직물 기술들이 아니라 섬유회사 사장인 남편에게서 거의 버림을 받은 아름다운 이사벨 부인이었다. 이사벨은 대저택의 곳곳에서 그와 사랑을 나누지만 그의 아이를 가졌을 무렵 “우리는 너무 멀리까지 왔어요”라는 편지를 남기고 그의 곁을 떠난다.

낙담한 그가 몇 년 후 다시 프랑스로 돌아갔을 때 그가 한 일은 지하의 갱도를 파는 것이었다. 악몽 같은 참호전의 연속이었던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프랑스 전선으로 징병 당한 것이었다.

제목인 ‘새의 노래’는 그가 땅굴을 팔 때 옆에 있어 준 카나리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소설은 달콤하고 뜨거운 밀애와 인간 존재를 한없이 추락시키는 전쟁의 처참함을 드라마틱하게 그려낸 현대 영미권 소설의 수작(秀作)이다. 영국 BBC방송의 독서 프로그램인 ‘빅 리드’가 독자들을 상대로 ‘영국인의 사랑을 받는 소설 100선’을 뽑았을 때 13위를 차지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칠흑 같은 땅굴, 언제 흙벽이 무너질지 모른다는 위기감과 폐쇄공포증…갱도 작업을 묘사한 대목은 손에 잡힐 듯 사실적이다. 시간을 건너 뛰어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의 목소리를 통해 전쟁의 비정함과 사랑의 진정한 가치를 오랜 여운이 남게끔 들려주는 작품이다.

권기태 기자 k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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