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유럽일주/0620~26]"하늘을 나는 기분 이런거구나…"

  • 입력 2005년 8월 2일 15시 2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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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20일 : 이동구간 Peibenbrue-Fussen : 60km

아침부터 산을 만났다.

아침엔 좀더 상쾌한 기분으로 자전거를 타고 싶은데 흐르는 땀이 장난이 아니다.

한참을 올라가도 양심 없는 이 산은 좀처럼 내리막을 보여주질 않는다.

'자전거로 유럽일주' 사진
'자전거로 유럽일주' 동영상

정말 한참을 고개 숙이고 올라가자 드디어 정상이 나온다.

무척 힘들고 짜증도 나지만 이 산이 보여주는 경치가 너무나 아름다워 쉽게 화를 낼 수가 없다. 아마도 우리가 향하는 스위스도 분명 이럴 것이다. 아니 이보다 더 아름답지만 그 높이 역시 이보다 훨씬 높을 것이다. 기대 반 걱정 반이다.

산 정상에서 11시가 다 된 시간에 늦은 아침을 먹는다. 물론 오늘 역시 무슬리(콘프레이크 종류)가 전부지만 땀 흘리고 먹는 탓인지 무척 맛이 있다.

오늘 우리는 로만틱가도의 맨 끝자락에 위치한 휘센을 향해간다. 휘센엔 유명한 노이슈반스타인성도 있지만 그 지역의 산과 호수가 만들어내는 경치가 일품이다. 길가엔 광고라도 하듯 표지판마다 로맨틱가도가 써있다. 무척이나 아쉬운 사실은 모든 표지판엔 친절하게도 일본말로 로맨틱 가도라고 써있다는 사실. 일본사람들만큼 이곳을 찾는 한국인도 무척이나 많지만 아직도 한글표기가 되어 있지 않은 사실에 기분이 좋질 않다.

한참을 달리고 있을 때 저 멀리 산 중턱에 작은 성 하나가 보인다. 처음엔 그냥 레스토랑이나 호텔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가까이 가보니 이 곳이 바로 노이슈반스타인성이다.

처음 성 밑에 자전거를 두고 올라갈 계획이었지만 별로 높지도 험할 것 같지도 않아 그냥 무작정 자전거를 끌고 올라갔다. 대한민국의 젊은이가 이렇게 자전거 여행을 하고 있다는 사실과 또 우리의 패기도 알릴 겸 많은 사람의 시선을 받으며 성까지 올라갔다.

무척 가까이서 보는 이 성은 그 유명세나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모습과는 달리 너무 단순하다. 또한 보수공사 때문인지 너무나 현재적인 모습에 고성 특유의 맛이 나질 않는다.

오히려 멀리서 바라본 이 성의 모습은 훨씬 근사하다. 높은 바위산과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뒤로하고 자리 잡은 모습. 그 동안 셋이 같이 사진을 찍은 적이 많지 않기에 이 모습을 배경 삼아 삼각대를 두고 정신없이 사진을 찍었다.

이제 더욱더 아름다운 스위스의 산들을 자전거로 올라가볼 생각이다.

6월21일 : Fussen-Lindau : 124km

아침부터 햇빛이 너무 뜨겁다.

이 햇빛을 받으며 오늘도 하루 종일 자전거 탈것을 생각하니 걱정이다.

유럽에 오면서부터 타기 시작한 우리의 얼굴은 아무리 썬크림을 덕지덕지 발라도 좀처럼 고와지거나 하얗게 되질 않는다. 한술 더 떠 매일 쓰고 다니는 선글라스 덕에 눈만 하야니 그 모습이 마치 팬더 곰 같다. 거기에 여행 전 파마한 머리는 비 온 뒤 자란 잡초처럼 마구 자라나 이제 어찌 할 수가 없다. 머리까지 이 모양이니 내가 봐도 내가 동양인이지 흑인인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그나마 다행인건 이런 모습에 수염까지 기르는 원제 덕분에 내가 조금은 더 깔끔해 보인다.

여행 전부터 기르기 시작한 원제의 수염은 밥 먹을 때 음식이 묻을 정도까지 자랐다. 동원이와 내가 아무리 자르라고 타이르고 구박을 해도 유럽 여성들은 자신처럼 남성다운 모습을 좋아한다며 수염 기를 것을 고수하지만 글쎄 유럽여성들의 마음이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여행 전 무척이나 평범한 모습 때문에 우리에게 구박을 받던 동원이는 많이 타기는 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나와 원제의 이런 모습에 상대적으로 무척 깔끔해 보인다. 아마도 여행을 하며 이런 우리의 모습 때문에 피해를 보는 건 동원이일 것이다.

약간은 장난스럽게 한 소리지만 여행의 중반으로 넘어가는 지금, 시간만큼이나 우리의 모습은 많이 변했다. 남들 여행처럼 외모까지 신경 쓰며 할 수 있는 여행이 아니어서 아쉬울 때도 있지만 그게 다 남들보다 더 열심히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더 열심히 여행을 했다는 증거일 수 있으니 마음 한 곳에 뿌듯함도 있다.

여행을 마친 뒤 남은 낡은 일기장과 너덜한 지도 한 장, 그리고 검게 그을린 얼굴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을 수 있다는 여행가 한비야 씨.

우리가 한비야 씨 처럼 대단한 여행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 우리 역시 여행 뒤에 남은 우리의 검게 그을린 얼굴과 마구 자란 머리, 또 길게 자란 수염을 보며 잊지 못할 소중한 여행에 대한 흐뭇한 미소를 지을 수 있길 바란다.

6월24일 : Zurich-Luzern : 65km

취리히를 거쳐 루체른까지 스위스에 들어 온지 벌써 삼 일이 됐다.

처음부터 예상은 했었지만 이 물가 비싼 나라에서 적지 않게 당황스럽다. 물론 천혜의 관광자원을 지닌 스위스를 관광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만 이왕이면 싼 값에 많은 것을 경험하고자 하는 우리에게 스위스는 그리 좋은 나라만은 아니다.

또한 가이드북의 설명처럼 스위스 사람들은 외국인에 대해 그리 친절하지만은 않은 것 같다. 잘 웃지도 않고, 먼저 인사를 건네는 다른 유럽 국가 사람들에 비해 조금은 무뚝뚝한 편이다. 비싼 물가에 사람들도 그리 친절하지 않으니 별로 정이 가질 않는다.

스위스 제1의 도시 취리히를 지나 루체른에 도착한 오늘.

무엇보다 금융의 도시답게 빌딩 숲이 가득했던 취리히에 비해 루체른은 무척이나 여유가 넘치고 볼 것이 많은 도시다.

유럽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 다리 '카펠교'를 비롯, 18세기 말 루이 16세와 마리 앙트와네트를 보호하다 전사한 스위스 용병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빈사의 사자상' 등 도시 곳곳에 중세의 느낌을 간직한 많은 볼거리가 있다. 특히 '빈사의 사자상'은 가장 인상 깊었던 볼거리. 몰락한 왕가와 죽어가는 스위스 용병의 슬픔을 정말 사실적으로 잘 표현했다.

시내 관광을 마치고 이제 이곳 루체른에서 시작되는 알프스 산맥을 따라 인터라켄을 향해 간다. 유럽의 지붕이라 일컬어지는 인터라켄. 과연 얼마나 높을지, 또 그래서 자전거를 타는 우리를 얼마나 힘들게 할지 기대도 되고 걱정도 된다. 거기에 그 높은 곳까지 올라가 135m의 높이에서 밧줄 하나에 몸을 맡기고 미련 없이 뛰어내릴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심장이 두근두근 거린다.

6월25일 : Luzern-Interlaken 이동거리 :76km

잠자기 전부터 한창이던 이 동네 축제가 새벽까지 그 열기를 식을 줄 모르고 계속된다. 덕분에 말할 것도 없이 잠을 설쳤으니 일찍 일어나기는 했지만 일어나기가 무척 힘들다.

전날 인터라켄 레포츠업체의 일정에 맞추느라 오늘 오후에 135m 번지점프를 예약했기 때문에 점심때까지는 인터라켄에 무조건 도착해야 하는 상황. 평소에 그렇게 게으름을 피우던 내가 오늘만큼은 일찍 일어나 설쳐대니 얄미울 법도 할 것이다.

평소에 비해 1시간30분 정도 일찍 출발. 주구장창 달려도 모자를 판에 산길이 계속 나와 급한 마음에 속도는 나질 않으니 환장할 노릇이다. 또한 산정상에서 바라보는 이 아름다운 경치를 주마간산으로 보고 있으니 인터라켄에 가면 더 좋은 경치를 볼 수 있다고 스스로를 달래보지만 아쉬움이 남지 않을 수 없다.

한참을 애태우며 힘들게 자전거 패달을 굴리는 순간.

설상가상으로 지금껏 잘 버티던 내 자전거의 스포크(자전거 바퀴의 활)가 두 개나 부러진다.

시간이 없는 상황, 또 하필 유럽에서 가장 물가가 비싼 스위스에서, 여기에 아무도 없는 첩첩산중에서 이런 일이 생기니 정말 최악의 상황이 아닐 수 없다. 터져 나오는 욕을 꾹꾹 참으며 무거운 가방을 짊어지고 다시 출발. 일단은 자전거 공구를 가지고 있는 원제를 만나 임시적으로라도 수리를 하려는 상황. 이건 또 무슨 일인지 앞서가던 원제가 아무리 따라가도 도통 보이질 않는다. 아무래도 산길을 내려오던 원제가 첫 번째 갈림길에서 길을 잘 못 든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휘어져 춤추는 바퀴를 끌고 한참을 가는데 이제 비까지 온다. 이런 상황에 그저 웃음밖에 나올 질 않는다.

흐르는 땀인지 비인지 얼굴은 범벅이 되며 5km, 4km, …1km… 드디어 인터라켄이다.

정말 힘들게 여기까지 왔다. 계획대로 시간 안에 도착했고 거기에 인터라켄 이곳저곳에 태극기를 붙이며 애타게 우리를 찾는 원제까지 만났으니 일단은 안심이다.

캠핑장에 짐을 풀고 이제 그렇게 소원하던 번지점프를 할 차례.

135m의 높이가 부담이 됐는지 동원이는 번지점프대신 패러글라이딩을 한단다. 원제 역시 말이 없는 것이 많이 긴장을 하고 있다. 친구들에게 멋지게 뛰어내리는 나의 모습을 보여줄 것을 다짐하며 케이블카에 오른다.

케이블카를 타고 한참을 올라가자 날씨가 추워지며 위에서 보는 그 높이가 장난이 아니다. 같이 올라간 수많은 젊은이들 역시 기대와 긴장으로 다들 흥분된 모습이다.

멀리서 봤을 땐 그다지 높아 보이지 않던 것이 막상 올라가보니 심장의 압박이 장난이 아니다. 여자들까지도 망설임 없이 뛰어내리니 남자체면에 안 뛸 수도 없고 미칠 노릇이다.

제일 먼저 멋지게 뛰어내릴 생각이었는데 나처럼 정신없어 하는 원제를 첫 번째로 떠밀었다. 생각보다 과감히 뛰어내리는 원제.

드디어 내 차례. 다리가 말을 듣질 않는다. 밑을 내려다보니 끝이 안 보인다.

내가 왜 비싼 돈 들여 번지를 하는지 후회가 막심하다.

4,3,2,1 번지…

조교의 구령에 맞춰 이를 악물고 뛰어내리는 순간. 나를 압박하던 공포는 어느 순간 내 인생 최고의 쾌감으로 바뀌어 온다. 엄청난 속도로 밑 호수를 향해 떨어지다 어느 순간 다시 하늘로 솟구쳐 있다. 줄 하나에 의지해 온몸을 맡기고 한없이 자유롭게 바라보는 알프스의 저녁노을. 이 순간은 정말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이다.

점점 반동이 작아지며 이 순간에 대한 아쉬움이 커진다.

밑에 내려가 원제를 보자 조금 정신이 돌아온다. 그렇게 긴장하던 원제 녀석, 용케도 떨어지며 준비해간 태극기를 멋지게 흔들었나 보다. 유럽 젊은이들에게 둘러 쌓여 태극기를 흔들며 같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비록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멋지게 뛰어내리진 못했지만 글쎄… 평생 이런 자유낙하의 기분을 이렇게 짜릿하게 느낄 수 있을지. 여러 우여곡절을 거치며 힘들게 이곳 인터라켄에 온 보람이 있다. 이곳에서 또 어떤 굉장한 일이 있을지 기대하시길.

6월26일 : In Interlaken(융프라우 기차 산행)

전날 번지점프의 쾌감이 아직 남아있는 듯하다. 어제 비 때문에 오늘로 패러글라이딩이 연기된 동원이가 일찍 짐을 챙겨 나간다. 번지와 달리 오랫동안 하늘을 나는 패러글라이딩은 어떨지 동원이에게 동영상 촬영을 신신당부한다.

어제 나와 원제가 번지점프를 하는데 5시간 정도가 걸린 것에 비해 2시간 정도 지나자 하늘을 날았노라고 싱글벙글하며 동원이가 돌아온다. 촬영한 패러글라이딩 동영상을 보자 번지점프의 쾌감과는 다른, 하늘을 나는 기분을 느낄 수가 있다.

오늘 우리는 유럽의 지붕이라 불리는 융프라우에 올라간다. 원래는 자전거로 올라갈 계획이었지만 어제 뜻하지 않은 내 자전거의 고장으로 기차를 타고 올라가기로 했다. 120프랑의 적지 않은 돈이지만 유럽에서 가장 높은 곳에서 보는 장관을 놓칠 수가 없다.

3,500m가 넘는 융프라우를 올라가는 길은 무척 재미있다. 넓게 펼쳐진 푸른 언덕과 그 위에서 한적하게 풀을 뜯는 소를 보며 가다 보면 어느새 바람이 차가워지며 만년설로 뒤덮인 바위산이 모습을 드러낸다. 고도가 높아지자 준비해간 과장봉지가 터질 듯이 빵빵해진다.

융프라우로 오르는 기차구간 중 가장 인상 깊은 곳은 바위산을 뚫어 만든 터널.

10km넘는 길이도 길이지만 이 높은 곳에서 그것도 바위산의 한가운데를 뚫어 관광열차를 운영할 생각을 하다니 관광에 있어 스위스의 저력이 무서울 정도이다.

3시간이 넘어 도착한 융프라우.

구름만큼 높은 이곳에 두발을 디디고 서있는 기분은 직접가보지 않고는 아무도 느낄 수가 없다. 이 모습을 어떤 말로 어떻게 표현해야 될지. 사방 어떤 곳을 찍어도 버릴 것이 없다.

높은 바위산을 덮고 있는 눈부신 만년설과 곳곳에 있는 크레바스, 무척 가깝게 느껴지는 태양. 내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이곳에서 느껴본다.

기차를 타고 내려오며 아쉬움에 자꾸 고개가 돌아간다.

작은 나라지만 알프스를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스위스는 대국이다.

한없는 부러움을 느끼며 이곳을 떠나는 아쉬움 속에 하루를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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