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07년 대한제국 황제없는 앙위식

  • 입력 2005년 7월 20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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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7월 20일 덕수궁 중화전. 대한제국의 고종황제가 신황제에게 황위를 물려주는 양위식이 열렸다.

그러나 200여 명의 무장 병력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는 가운데 이루어진 이날의 양위식은 주인공이 없는 이상한 자리였다. 황위를 물려줄 고종황제도, 황위를 이어받을 순종황제도 참석하지 않았던 것이다. 대신 내시 두 사람이 신구 황제의 역할을 맡아 양위식을 대행했다. 세계 사상 유례가 없는 기이한 풍경이었다.

일제가 이미 군사권과 외교권을 빼앗겨 무력해진 조선의 황제를 갈아 치우기로 결정한 직접적인 원인은 ‘헤이그 특사파견’이었다.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된 이상설, 이준, 이위종이 7월 5일 각국 기자들과 만나 일본의 조선 침략을 규탄하자 일본 정부 내에선 ‘고종을 더 이상 내버려 둘 수는 없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7월 18일, 일본 외무대신 하야시가 서울에 도착했다. 하야시는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밤을 새워 고종을 협박했다. ‘황위를 내놓지 않으면 황실의 안녕조차 보전할 수 없을 것’이라는 으름장이었다.

친일 대신들조차 쇠락해가는 제국의 황제에게 등을 돌렸다. 일본 측의 협박 속에 열린 각부 대신의 어전회의. 농상공부대신 송병준이 말문을 열었다. “폐하께서 우방과의 우호를 깨뜨리는 데 들인 재물이 실로 1억 원에 이릅니다. 이 돈은 인민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일로(러-일)전쟁 뒤 폐하께서 일본의 신의를 저버리기만 열네 번에 이릅니다. 인자하신 이토 통감께서 언젠가는 마음을 돌이키실 것으로 여겨 참고 계십니다만, 밀사 파견으로 사태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그를 배후 조종한 일본 측의 비밀 기록에 쓰여 있는 발언 내용이다.

양위안을 고종에게 내민 것은 이완용이었다. 고종은 ‘역적 같은 놈들’이라고 일갈한 뒤 상대를 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후 고종은 어떤 외부 인사도 만날 수 없었다. 7월 20일의 양위식은 계획대로 진행됐다.

백성들이 가만히 있을 리는 없었다. 장지연(張志淵) 등이 주동이 된 대한자강회가 나서서 격렬한 양위 반대운동을 벌였지만 한 달 만에 일본에 의해 해산됐다. 7월 31일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면서 전국 각지에서 ‘정미(丁未)의병’이라고 불리는 군사운동이 일어났지만 역시 무력으로 진압됐다. 그러나 이때의 의병 활동은 이후 만주를 중심으로 일제강점기 내내 일본군을 괴롭힌 독립군 활동의 선구를 이루게 됐다.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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