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그리스 비극의 한가운데에 서다

  • 입력 2005년 4월 26일 19시 2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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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 예술의 전당
사진 제공 예술의 전당
누군가 길에서 큰 소리로 연설한다고 치자. 자연히 사람들이 몰려든다. 한동안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던 사람들은 다시 뿔뿔이 흩어져 각자 가던 길을 가게 될 것이다.

역사의 한 순간을 공유하지만, 동시에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코러스). 이 ‘코러스’야 말로 연극 ‘아가멤논’의 주인공들이자, 핵심 개념, 그리고 퍼포먼스에 가까운 이 연극을 이해하는 열쇠다.

그리스 연출가 미하일 마르마리노스가 내한해 국내 배우들과 함께 만든 이 연극은 고대 그리스의 시인 아이스킬로스의 대표작 ‘오레스테리아’ 3부작 중 첫 편이다.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 아가멤논이 아내에게 살해되는 내용을 그렸지만, 정작 극의 대부분은 아가멤논이 아닌 11명의 ‘코러스’들이 이끈다. 여기에, 연출가는 관객마저 코러스로 연극에 끌어들인다.

연극은 극장이 아닌, 극장 앞 로비에서 시작된다. 예술의 전당 5층 난간에서 배우가 대사를 읊기 시작하면 2층 토월극장 앞에 서 있던 관객들은 우르르 난간으로 몰려든다. 7분간의 짧은 공연 후 관객은 극장으로 인도되지만, 이번엔 객석 아닌 무대 위다. 관객은 어느새 그리스 시민이 되어 아가멤논의 노래와 연설을 듣는다. 관객 사이로 ‘군중 역’을 맡은 진짜 배우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대사를 던진다.

관객들의 수군거림, 호기심 어린 눈초리. 이런 자연스러운 행동은 바로 연출가가 의도한 ‘연기 아닌 연기’다. 싫든 좋든, 모든 관객은 어느 새 이 연극에 참여하는 셈이다. 마치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누군가 만들어가는 역사의 흐름에 휘말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이 연극의 메시지는 바로 이것이 아닐까.

벽안의 연출가는 한국 춤사위부터 가요, 그리고 애국가까지 섞어 고대 희랍극을 한국의 현대극으로 이끌어내려 했다. 쉬운 작품은 아니지만, 두 시간 반 동안 관객들이 로비에서 무대로, 무대에서 객석으로, 그리고 객석에서 다시 무대로 옮겨다니며 맛보게 되는 즐거움은 분명 색다르다. 5월11일까지. 2만∼4만원. 1588-7890

강수진 기자 sjk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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