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여사는 동아일보 사장과 중앙학교·보성전문 교장을 지낸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 선생의 부인이기도 하다. 국가보훈처 포상 신청 당시 여사의 이름을 이아수(李娥洙)로 잘못 표기했다고 유족 측은 밝히고 있다.
이 여사는 정신여학교에 재학 중이던 1919년(당시 20세) 3월 5일 서울 남대문역 앞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하다가 일경에 체포됐다. 이 여사는 혹독한 경찰 조사 때는 물론 공판 과정에서도 “다시는 이런 행동을 하지 않겠다면 관대히 처분하겠다”는 재판관의 회유를 일축한 채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하다 6개월 실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이 여사는 “정숙한 이 내 몸에 포박이 웬 말인가. 청춘의 끓는 피 참기 어려워 울음이 목맺히도다”는 옥중 시로 세인의 가슴을 울리기도 했다(동아일보 1920년 4월 20일자 3면).
인촌 선생은 일본 도쿄유학생 시절부터 친했던 김우영(金雨英) 변호사의 첫 변론을 지켜보러 나왔다가 당당하고 정연하게 진술하는 이 여사의 모습에 크게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부인과 사별했던 인촌 선생과 이 여사는 1921년 1월 결혼했다.
박성원 기자 swpark@donga.com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