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화 두소리]‘역도산’을 보고

  • 입력 2004년 12월 22일 16시 2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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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싸이더스
사진제공 싸이더스
《‘역도산(力道山)’. 제작비 110억 원, 한국 관객이 일본어로 연기하는 한국배우를 한글자막으로 이해해야 하는 본격적인 한일 공동 제작영화, 주연배우 설경구의 광기 들린 변신…. 제작과정부터 한국영화사(史)에 이정표가 될 만한 기록들을 남긴 ‘역도산’은 과연 세계시장을 겨냥한 성공적인 한국형 블록버스터인가, 아니면 작가주의 영화와 블록버스터라는 두 갈래 길 사이에서 좌표를 잃은 표류작인가.

‘한 영화 두 소리’의 부부 영화평론가 남완석 교수(전주 우석대)와 심영섭 씨가 각각 낙관과 비관의 입장에 서서 팽팽한 격론을 벌였다.》

∇남완석 교수=흔히 영웅적인 인물을 영화로 다룰 때는 인물의 위엄에 눌려 더 신화에 빠져버리지. ‘역도산’을 보니까 반일감정, 민족주의에 편승하거나 역사적 해석만 나열하지 않으면서도 인물을 객관적으로 그려 낸 전기영화로 완성돼 호감이 갔어.

∇심영섭 씨=역시 관람에 성차가 존재하나 봐. 나는 ‘역도산’을 보며 송해성 감독의 전작인 ‘파이란’을 떠올렸는데? 감독의 손에서 역도산은 영웅이 아니라 실패한 남자로 재창조됐어. 나는 이 영화가 실존 인물에 대한 전기가 아니라 남성멜로라고 생각해.

∇남=영화 속에서 역도산은 성공해서 “맘껏 웃으며 살겠다”고 말해. 그는 자신의 비천한 운명, 조국, 심지어 자신이 이룬 성공으로부터도 끊임없이 ‘도망’하면서 다음 목표로 달려가지. 그에게 사각의 링은 도망갈 곳이 없는 막다른 감옥이었어. 결국은 그 꿈 때문에 아내마저 잃지. 그런 역도산이 어떻게 ‘파이란’의 실패한 조직폭력배 강재와 닮았다는 거지?

∇심=역도산이 자기가 땄던 트로피를 모두 쓸어버리는 장면 기억나? 자기 자신의 과거에 대한 부정이야말로 극단적인 허무야. 송 감독의 영화에서 폭력은 박찬욱 감독이나 김기덕 감독의 폭력과는 완전히 달라. 그것은 지독히 정서적인 폭력이야. 슬픔과 분노가 함께하는 폭력이지. ‘파이란’과 역도산의 슬픔은 일맥상통해. 난 그 점에서 이 영화가 “한국영화 사상 가장 비싸게 만들어진 속편”이라고 봐.

○ 작가주의적 해석과 블록버스터 사이

∇심=그런데 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게 제작사인 ‘싸이더스’ 차승재 대표의 판단이야. 송 감독은 정적이고 미시적인 스토리에서 힘을 발휘하는 감독인데, 붓으로 치자면 세필(細筆)이지. 그런데 ‘역도산’은 제작비 규모에서나 작품 성격에서 큰 붓을 휘둘러야했던 작품이거든. 그런 점에서 송 감독에게 메가폰을 맡긴 제작자의 판단에 의문을 갖게 돼.

∇남=‘역도산’은 실제로 영화에 그려진 것보다 훨씬 성공적이었던 인물이었어. 역도산의 한 해 소득이 소니사(社)의 매출보다 더 많았던 때도 있었으니까. 블록버스터를 지향했다면 이런 사실들은 결코 설명을 포기할 부분이 아니었다고 생각해. 인물에 대한 작가주의적인 해석과 막대한 제작비가 들어간 블록버스터라는 양 극단의 어딘가에서 균형을 잡았으면 좋았는데, 그런 게 부족하긴 했지.

▽심=혹 감독이나 제작자 모두 세상을 살며 헤쳐가야 하는 남자의 슬픔이나 꿈을 ‘역도산’ 속에서 본 것은 아니었을까? 분명 영화 속에서 자기모순적인 인물로 역도산의 성격을 그리고 있는데도 말이지. 일왕과 왕세자 앞에서 레슬링 시범경기를 보여주는 장면에서 역도산이 자기 성정을 못 이기고 링 위에 뛰어올라가 오버하는 대목이 참 좋던데, 감독은 그걸 더 끌고 가지 않더라고.

▽남=할리우드에 비해 한국영화에서 잘 안 되는 대표적 장르가 스포츠영화야. 난 그렇게 위험부담이 큰 장르를 선택했다는 점 때문에라도 이 영화를 인정해줘야 한다고 생각해.

▽심=스포츠라기보다 이 영화는 그야말로 ‘파워’의 문제를 다루려 하지. 그런데 그 파워가 어떻게 한 사내를 파멸시키는지, 역도산이 어떤 사회적인 틈바구니 속에서 존재했는지, 한국인인 그가 일본 사회와 어떤 방식으로 맺어졌는지 입체적으로 그려지질 않아. 오로지 역도산에만 카메라를 클로즈업하다보니 중요한 링에서의 경기 장면조차 인물의 내면이 드러나는 게 아니라 “과하다, 더 잘라냈어야 했다” 싶어.

▽남=역도산에 카메라를 들이댄 건 어쩔 수 없는 선택 아닐까. 아무리 설경구가 몸을 만들었다고 해도 풀 샷이 아니었다면 상대역의 진짜 선수들 틈바구니에서 역도산의 거대한 힘이 느껴졌을까. 그런데 역도산 역을 설경구가 아니었다면 누가 맡을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 설경구가 가진 카리스마가 역도산과 잘 들어맞는 것 같아.

○ 한류 이어갈 본격적인 시도

∇심=설경구는 내면에 광기가 있는 배우야. 굉장한 집중력을 가진 사람이지. 그런데 설경구를 보면서 감탄하고 압도돼도 관객이 감정이입을 하고 자기와 동일시할 수 있는 배우는 아니야.

▽남=어떻게 보면 설경구라는 배우의 연기 폭이 좁은 거지. 하지만 설경구가 대한민국의 배우들, 아니 국제적으로도 다른 배우들에게 모델이 될 만한 배우라고 생각해. 배역을 맡으면 철저히 그 인물이 된다는 점에서 그 유명한 로버트 드니로에 비견될 만하지.

▽심=난 역도산의 후견인인 칸노 회장 역의 후지 다쓰야의 연기가 좋았어. 거물이면서도 인간적이고 그러면서도 범접을 허용하지 않는…. 칸노의 역할 소화가 빼어났기 때문에 칸노와 역도산의 관계에서 오히려 역도산의 내면이 드러났던 것 같아. 그에 비해 아내인 아야(나카타니 미키)와의 관계는 너무 평면적이지.

▽남=그 점을 좀 짚어보자. 한국인과 일본인이 동시에 출연하는데 한국인보다 일본인이 오히려 더 긍정적으로 그려졌다는 점에서 난 이 영화가 기존의 열등감 같은 걸 극복하는 면이 있다고 봐. 하지만 왜 한중, 한일 합작 영화에서는 꼭 남자가 한국인이고 그를 사랑하는 여자는 중국인 아니면 일본인일까. 여기엔 지배자가 되고자 하는 어떤 무의식이 깔려 있는 거 아닐까.

▽심=난 그게 한국남자들의 판타지라고 생각해. 더 이상 남한 여자들에게는 기대할 수 없는 지고지순의 사랑을 중국이나 일본 여자에 투영하는 거지. 그런 점에서 난 이 영화가 지극히 한국적인 정서를 토대로 만들어졌다고 봐. 과연 이런 정서로 아시아 관객을 설득해낼 수 있을까.

▽남=세계시장을 겨냥해 100억 원이 넘는 제작비를 들여 만든 작품이기 때문에 한국영화계 전체의 향후 행보를 생각해서도 이 영화가 꼭 성공해야 된다는 부담은 커. 하지만 이 영화는 이미 소니 저팬에도 사전 투자 형태로 250만 달러에 판권이 팔렸고 해외시장의 반응이 있어서 국내 관객은 300만 명 정도만 들면 적자는 면할 수 있다고 들었어. 세계를 겨냥하는 거라면 제작비 100억 원도 꼭 과다하다고만 볼 수는 없는 거 아닐까. 기획 단계에서 그런 마케팅까지 고려된다면, 나는 현재의 한류 열풍을 이어가는 본격적인 시도로서 ‘역도산’ 같은 영화가 만들어지는 건 의미 있고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한다고 봐.

정리=정은령 기자 r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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