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이학준]미술시장 숨통 틔우기

  • 입력 2004년 12월 17일 17시 3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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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국내 미술시장은 어둡고 긴 터널 속에서 헤맸다. 1992년 시작된 장기 불황의 늪에서 국내 미술시장도 헤어나오지 못한 탓이다. 이른바 인기작가의 수도 1980년대 말 미술시장이 호황이었을 때와 비교해 3분의 1 수준으로 줄었고 호사가들 사이에서 회자되던 ‘미술시장 10년 주기 호황설’도 설득력을 잃은 지 오래다. 그나마 거래가 활발한 일부 작가들의 작품이 있긴 하지만 특정 작품에만 거래가 집중되는, 극히 선별적인 양상이어서 미술 관계자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여기엔 경제 상황과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장기 불황의 씨앗은 이미 1980년대 말∼1990년대 초 건국 이래 최대 호황기라고 하던 때 이미 잉태되고 있었다. 일부 인기작가의 작품 가격이 급등하자 투기적 소장가들이 가세했고 일부 미술품 유통 관계자들이 작품 가격 폭등을 부추겼던 것이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순수한 미술애호가들은 상처를 받고 미술시장을 영영 떠나 버렸다. 시장의 신뢰 상실, 이것이 우리 미술계가 풀어야 할 최우선 과제다.

그러나 어둡게만 볼 필요는 없다. 한국 미술시장의 미래에는 긍정적인 요소가 더 많다. 한국 젊은 작가들의 작품이 소더비, 크리스티 등 유명 경매회사를 통해 국내보다 훨씬 높은 가격에 팔려 나가 오히려 시장 관계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한국 작가들의 작품이 현대미술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뉴욕부터 홍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지역에서 다른 국적의 소장가들에게 팔려 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한국 작가들이 그동안 각고의 노력을 통해 국제성을 확보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작가뿐만 아니라 소장가에게도 변화가 있었다. 장기 불황을 통해 투기세력은 거의 시장에서 퇴출됐다. 경험 많은 애호가 그룹과 새로운 감각의 신진 소장가 그룹은 어려운 미술시장을 지탱해 주는 근간이 되고 있다.

미술품의 특성상 귀한 작품은 고가에 거래되기 마련이다. 국내 경매 역사상 가장 비싸게 팔린 작품은 7억 원에 낙찰된 겸재 정선의 작품이다. 올 5월 소더비 경매에서는 미술품 경매 역사상 최초로 1억 달러 이상에 거래된 피카소 작품이 나왔다. 물론 미술시장의 환경과 규모가 다른 마당에 단순 비교할 순 없지만 괴리는 너무 크다.

귀하고 좋은 작품이 제대로 된 가격에 양성적으로 거래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될 때 한국 미술시장과 미술계 전체에 미래가 있다. 그러나 지금은 작품을 파는 사람이나 사는 사람 모두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는 것을 부담스러워한다. 귀한 작품이 고가에 거래되는 것이 우리문화의 자존심을 세우는 일과 무관치 않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미술품 거래를 바라보는 더 성숙된 국민의식이 절실할 때다.

전업작가 1500명 가운데 1년 평균소득이 500만 원 이하인 작가가 70%를 차지하는 현실에서 한국 작가들이 국제무대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다는 점은 전적으로 작가들의 노력의 결과다. 그와 함께 여러가지 오해에도 불구하고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일 수 있는 미술품 수집에 끊임없는 애정을 보여 주는 소장가들을 보면 간송이나 호암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좋은 소장가는 좋은 작가와 같다’는 말을 지울 수 없다.

지금 우리는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지만 저만큼 터널 끝에 햇살이 보인다. 오랜 추위 끝에 돋아나는 새싹을 함께 소중히 키워 나갈 일만 남았다.

이학준 서울옥션 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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