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홍성철 兄만한 ‘화합의 명수’ 또 있을는지…

  • 입력 2004년 5월 5일 19시 11분


고(故) 홍성철 형과 동문수학한 나는 그와 같은 친구를 갖는 것이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언제나 야당의 길을 걸어왔으나 홍군은 일찍이 공직생활로 인생을 시작했다. 그는 내무부장관 대통령비서실장 등을 지낸 권력핵심이었지만 우리의 우정에 금이 간 적은 없었다. 오히려 그런 차이가 두 사람을 더욱 밀착시키는 촉매역할을 했는지도 모른다.

홍군은 학교에 다닐 때도 공부만 하는 순진파가 아니었다. 그는 축구선수와 배구선수에다 필요할 때는 주먹도 거침없이 휘두르는 정의의 사나이였다. 그리고 말술도 마다하지 않는 호방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가 야당에 몸담고 있는 나와 거리낌 없이 만날 수 있었던 것도 대범한 성격 때문이었다.

1985년 9월 첫 남북이산가족 만남 때 홍군이 실향민 대표로 평양에서 누님을 만나 “매달 보름달이 뜨면 남과 북에서 서로 달을 쳐다보며 그리움을 달래자”고 해 실향민들이 다시 한번 슬픔에 젖은 일이 있다. 이는 남북막후교섭의 설계자였던 그가 이미 남북관계의 정확한 현주소를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도 북한의 속내를 훤히 꿰뚫으면서 남북기본합의서를 만들어 낸 홍군처럼 역사창조의 산파역을 담당할 인물이 필요한데 그는 이미 갔으니 이를 어쩌나 하는 걱정이 가슴을 저민다.

홍군이 있으면 웃음이 있고 재미가 있다는 것이 친구들의 생각이었다. 그가 완강한 반공주의를 상징하는 ‘실향민의 대부’로 인정받으면서도 대북 화해의 길을 개척한 것은 과연 명불허전의 ‘화합의 명수’라는 것을 입증한다.

이제 홍군은 저승으로 갔다. 하늘나라에서도 그는 화합의 길을 개척할 것이다. 오늘처럼 국민적 화합이 필요한 때에 그를 잃어 더욱 안타깝다.

유치송(柳致松) 전 헌정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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