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미기자의 감성크로키]이런 관계…저런 관계…

  • 입력 2004년 3월 18일 16시 1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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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대화를 듣게 된 것은 목요일 저녁이었다.

나는 서울 신촌 대학가 이탈리아 식당의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남자와 여자는 20대 초반 대학생으로 추측된다. 의자 위에서 입을 벌리고 있는 여자의 큼지막한 가방 속에는 심리학 개론과 교양 영어 책이 들어 있다.

특별히 그들을 주목한 것은 아니었다. 대학가의 식당은 옆 테이블 손님의 속삭임마저 잘 들릴 정도로 테이블을 다닥다닥 붙여 놓았다. 남자는 라자냐를, 여자는 그라탕을 주문했다.

남자는 여자에게 좋아하는 음악, 스포츠 등에 대해 물었다. 대학 수강신청과 변경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화제가 바뀔 때마다 잠시 동안 말문이 끊기기도 했다. 여자는 가끔씩 손으로 입을 가리며 수줍은 듯 웃었다.

여자가 아주 느린 속도로 음식을 먹자, 남자가 말했다. “부산 식당 갈 걸 그랬네요.” 부산 식당은 싸고 푸짐한 메뉴로 소문난 인근 밥집이다. “원래 천천히 먹는 편이에요.” 그녀의 대답이다.

어색하고 서먹한 대화를 통해 나는 그들의 관계가 이제 막 시작된 것일 거라고 짐작한다.

그들의 표정과 목소리, 특히 대화 도중 적당한 쉼표가 퍽 신선하다. 상대방을 천천히 새롭게 알아가는 과정을 피곤하게 여겨온 자신을 문득 발견한다.

필요한 용건만 신속하게 묻고 답하는 관계, 떠들썩하고 화려한 파티에서 표면적인 웃음으로 스치듯 만나는 관계, 금전 출납부처럼 투자 시간 대비 효율을 따지는 관계…. 어느새 익숙해져 버린 관계들이다.

얼마 전 한 대학 교수가 소개한 비디오 작가 모건 피셔의 영상물은 강한 인상을 남겼다. 완전히 벌거벗은 여자가 낡은 녹음기 앞에서 여러 질문을 녹음한다.

당신은 눈은 무슨 색깔입니까, 보조개가 있습니까, 안색은 어떻습니까…. 여자는 자신이 녹음한 질문을 틀어놓고 스스로 인터뷰이가 된다. 눈은 갈색이고, 보조개는 있어요. 안색은 그럭저럭 괜찮죠.

생각해 보니 남과의 관계뿐 아니라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건방진 생략을 하고 있다. 영상의 공간에서는 천천히 식사하세요, 라는 교수의 철학적 주문이 ‘천천히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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