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불량배들'…지궂상에 민주주의 국가는 없다?

  • 입력 2003년 11월 28일 17시 35분


극단 산울림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자크 데리다는 두 주인공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끝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고도’처럼, 역사상 한 번도 제대로 실현된 적 없는 ‘도래할 민주주의’에 대해 이야기한다.동아일보 자료사진
극단 산울림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자크 데리다는 두 주인공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끝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고도’처럼, 역사상 한 번도 제대로 실현된 적 없는 ‘도래할 민주주의’에 대해 이야기한다.동아일보 자료사진
◇불량배들/자크 데리다 지음 이경신 옮김/328쪽 1만8000원 휴머니스트

사뮈엘 베케트 원작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두 주인공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결코 오지 않을 고도를 기다리며 알 수 없는 말들을 늘어놓는다. 연극을 보고 있노라면 관객들 또한 어느덧 두 사람과 함께 고도를 기다린다. 하지만 고도는 끝내 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연극 속에 고도의 존재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비록 연극이 끝나는 순간까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지만, 단지 ‘도래할 고도’로서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73)는 ‘불량배들(Voyous)’이라는 다소 생뚱맞은 제목의 이 책에서 ‘도래할 민주주의’에 대한 설명으로부터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고대 그리스부터 지금까지 대부분의 나라들이 민주주의를 표방해 왔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지구상 어느 나라도 민주주의에 적합하지 않으며 민주주의의 정체 또한 분명히 무엇인지 알고 있지 못하다. 사실상 민주주의는 ‘도래할 민주주의’로서 항상 유보되고 있을 뿐이다. 게다가 미국처럼 자신이 곧 가장 완전한 민주주의의 실현태로 자처하는 국가에 그것은 거꾸로 오만과 무력행사를 위한 알리바이를 제공한다.

아마도 ‘미국의 양심’으로 불리는 언어학자 놈 촘스키의 저서 ‘불량국가’를 알고 있는 독자들은 이 책의 제목만 봐도 어떤 주제를 다루고 있는지 짐작할 법하다. 데리다는 이 책에서 이라크 리비아 북한 등 자신의 적대 국가들을 불량국가로 규정하고, 자신을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자처하는 미국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촘스키의 책이 국제정세와 군사적 대립 등 구체적 분석을 통해 미국의 패권주의를 비판하고 있는 것과 달리, 이 책은 ‘불량배’라는 담론 자체에 대한 철학적 분석을 통해서 미국의 야만성을 간접적으로 공격하고 있다.

데리다가 보기에 민주주의의 질서를 어기는 국가들을 불량배들로 규정한 미국이야말로 진정한 불량배인 것이다. 여기서 민주주의란 고대 그리스로부터 추앙받은 가장 고귀한 가치이자 ‘이성’의 다른 이름이다. 여기서 데리다가 민주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한 니체의 관점을 이어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다.

그런데 이런 근대적 이성 비판이니 계몽주의 이데올로기 비판이니 하는 이야기에 이미 식상한 독자들도 많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책에 나타난 데리다의 전체적인 논변이 기대만큼 참신하지 않다는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이 책은 건강상의 이유로 활동이 뜸했던 데리다가 2002년 7월과 8월 파리 교외의 스리지라살 국제문화센터와 니스대에서 행한 두 차례의 특별강연을 에세이로 정리한 것이다. 각 에세이의 주제가 ‘최강자의 이성’과 ‘도래할 계몽주의의 세계’라는 사실만 보아도 전반적인 논의의 방향을 예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주제의 진부함을 한 방에 날려버릴 데리다만의 독특한 매력을 풍기고 있다. 데리다의 난해한 철학적 개념들이 구체화돼 있을 뿐 아니라 플라톤, 칸트, 후설의 철학들이 이 구체적인 주제와 맞물려 새롭고도 독특한 방식으로 해석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책에서 결코 진부한 내용이 반복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원칙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확인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데리다의 책을 읽다가 포기한 독자들이라면 다시 한번 도전해 볼 만한 책이다.

박영욱 고려대 강사·서양철학 imago103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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