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구기자의 현장체험]에버랜드서 '늑대'가 되다

  • 입력 2003년 11월 27일 16시 3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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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손짓 하나에도 환호하며 기뻐하는 사람들행복해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단지 손을 내미는 정도의 수고로움(?)뿐. 가슴을 꼬집는 짓궃은 아이들도, 늑대의 탈을 보고 우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이날 거리에서 만난 관람객들 중 표정이 일그러진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이종승 기자

작은 손짓 하나에도 환호하며 기뻐하는 사람들행복해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단지 손을 내미는 정도의 수고로움(?)뿐. 가슴을 꼬집는 짓궃은 아이들도, 늑대의 탈을 보고 우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이날 거리에서 만난 관람객들 중 표정이 일그러진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이종승 기자

Dear Abby:요즘 무척 우울합니다. 진심으로 저를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데도 없는 것 같아요. 삶의 의욕도 없고요. 그저 눈뜨면 일하고 퇴근하면 잠자기의 연속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Dear Melancholy:작은 일에 감사하세요. 당신이 먹는 밥 한 톨, 출근하면 기다리고 있는 일들, 따스한 이부자리…. 그것조차 없는 사람들은 얼마나 불행할까요.

Dear Abby:당신의 충고대로 행동했습니다. 머리로는 감사하는데 우울함은 여전합니다. 뭔가 확실한 처방전은 없을까요?

Dear Melancholy:정 그렇다면 이 기사를 읽어보세요. 그리고 그대로 한번 해보세요. 그러고도 효과가 없다면… 신문을 바꾸세요.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어 한다. 어느 날 아침, 문득 잠에서 깼을 때 밀려오는 알 수 없는 충만감. 눈부시게 빛나는 싱그러운 햇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경쾌한 아바(Abba)의 슈거 팝, 집안을 가득 채운 옅은 커피향….

하지만 그런 날보다 괜히 우울하고 짜증나고 나만 따돌림 당하는 것 같은 날들이 더 많기 마련.

기분전환을 해보려 쇼핑을 하고, 미팅을 하고, 여행을 떠나지만 그다지 뾰족한 방법은 아니다. 되레 홧김에 쓴 돈 때문에 속만 더 아플 뿐….

돈 한 푼 들지 않고 기쁨을 느낄 수 있는 방법. 자신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까지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놀이동산에 가서 캐릭터 인형 탈을 써보는 것. 양, 토끼, 늑대…. 종류는 관계없다. 단 30분 만에 인생이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경기 용인 에버랜드 공연단의 도움을 받아 불과 2cm 틈새로 바라본 세상은 온통 장밋빛과 웃음이 가득한 안데르센의 세상이었다.

● g.o.d. 맞장뜨자!

오후 1시반. 에버랜드에서는 거리 퍼레이드 준비가 한창이다. 왕자, 공주, 눈의 요정, 토끼 등등 동화 속 각종 배역으로 분장한 단원들이 서로 안무를 맞추고 매무새를 점검하며 바쁘게 움직인다.

기자가 이날 입은 옷은 늑대. 만화영화 ‘딱따구리’에 나오는 바로 그 늑대다.

단원들의 도움을 받아 늑대 탈을 쓰고 나니 마치 방독면을 쓴 것처럼 숨이 ‘헉’하고 막혀왔다. 더 큰 문제는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

망사로 처리된 2∼3cm 크기의 늑대 눈을 통해 봐야하지만 전혀 발아래가 보이지 않는다. 더욱이 인형의 발이 워낙 커 움직임도 부자연스럽다.

오늘 이 옷을 입고 단원들처럼 똑같이 춤추고, 귀여운 짓을 해야 한다. 양반집 아들이….

다른 캐릭터 인형들은 각자 안무가 있지만 기자라는 ‘빽’ 때문에 안무에서는 예외를 인정받았다. 하지만 인형 자체가 워낙 움직임이 귀여워 가볍게 손만 흔들어도 큰 티는 나지 않았다.

드디어 공연 시간인 오후 2시. 자∼출발하자고∼.

무슨 말이 필요 있을까?

인기 폭발. 근처에만 다가가도 자지러지는 여고생들…. g.o.d.도 이런 기분이었을 테지.

손 한번 잡아주면 “꺅!”

사진 한 장 찍어줘도 “꺅∼!”

먹던 옥수수를 빼앗아도 “하하 호호.”

한 대 때리고 달아나도 “하하 호호.”

처음엔 쑥스럽고 어색해서 굳어진 몸도 시간이 지나면서 풀리기 시작하더니 ‘박수홍 춤’이 막 나오기 시작했다. 좋아서 쓰러지는 아이들.

내가 왜 이러지?

불과 30분밖에 안되는 퍼레이드지만 30년어치의 웃음을 함께 했다. 탈속은 땀으로 흥건히 젖었지만 우울함도 날아갔다.

● 내가 늑대냐? 늑대가 나냐?

탈을 쓰고 돌아다니다 보니 몇 가지 흥미로운 것을 알게 됐다.

어떤 여자도 내가 끌어안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 되레 안아주지 않으면 삐쳤다. 내 인생에 이런 날이 오다니….

애들아 줄 서!

주의 깊은 관람객이라면 이날 에버랜드에서 젊은 여자들만 껴안고 다니는 묘한 늑대를 보지 않았을까?

하긴 늑대가 원래 그런 것 아니야?

또 다른 장점은 워낙 앞이 보이지 않아 상대방이 예쁜지, 못생겼는지 구별이 안된다는 것. 이게 더 행복하게 만든 요인인 듯싶다. 불행은 비교에서 오니까.

서너살 미만의 유아일 경우 캐릭터 인형을 보고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들이 간혹 있다.

그저 낯설어 그러려니 했는데 아동심리학적으로 이유가 있단다.

본능적으로 아버지가 세상에서 가장 크고 강한 사람으로 느끼는 유아들이 아버지보다 큰 인형을 보게 되면 두려움에 울게 된다는 것. 이 때문에 대부분의 캐릭터 인형은 키가 작은 여성들이 분장을 한다.

그저 탈 쓰고 돌아다니면 되는 줄 알았는데 이 세계에도 룰이 있었다.

절대로 말을 하면 안 된다. 환상이 깨지기 때문.

아이들은 인형을 하나의 생명체로 느끼기 때문에 안에 사람이 들어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환상이 깨지게 된단다.

담배를 피우거나 음식물 가까이 가는 것도 절대 엄금. 옷을 입고 음식물을 먹는 것도 마찬가지다.

음식물을 피하는 것은 옷이 워낙 비싸기 때문. 옷마다 차이는 있지만 수백만원에서 수천만원을 호가한다. 내가 입은 늑대 옷도 무려 150만원짜리다. 직접 손으로 특수제작한 것이라 비쌀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그런 비싼 옷에 불똥이 튀어 구멍이 난 것을 모르고 공연에 들어가면 아주 곤란한 상황이 발생한다.

귀여운 토끼 몸에 ‘담배빵’이 있으면 좀 깨잖아?

●나의 슬픔이 네게 위안이 된다면….

결혼 승낙을 받으러간 모 개그맨이 직업 때문에 반대에 부닥치자 “직업은 개그맨이지만 인생까지 개그는 아니다”라는 말로 승낙을 받았다는 말이 있다.

이 세계도 비슷하다. 밝고 귀여운 인형역이지만 탈속의 사람까지 항상 즐겁고 행복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분장을 하고 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최선을 다한다.

“사람인데 왜 슬픈 일이 없겠어요. 하지만 공연을 하고 행복해하는 아이들을 보면 언제 그랬느냐싶은 걸요. 그게 좋아서 계속 하죠….”

5년차인 에버랜드 공연단 김규석 단원(28)은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줄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라며 “공연을 보며 행복해하는 연인, 아이들을 볼 때마다 내 자신도 새로운 기쁨을 얻는다”고 웃으며 말했다.

여담이지만 한여름에 탈을 쓰고 다니면 찜질방이 무색할 정도. 11월 중순에도 온통 땀바다였으니 한여름의 고충은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아이들이라고 다 착한 것도 아니다. 사내아이들은 인형의 몸을 쿡쿡 찌르며 “야! 남자인지 여자인지 확인해보자!”고 달려든다.

나도 이날 가슴과 중요부위를 꼬집혔다. 이것들을 그냥∼.

캐릭터 인형 체험은 에버랜드의 상설 프로그램은 아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경험을 해보고 싶다면 회사측에 편지나 e메일을 보내면 약간의 절차를 거쳐 체험해 볼 수 있다. 물론 무료다.

사이먼&가펑클의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에 이런 구절이 있다.

‘당신이 의기소침해 있거나

당신 눈에 눈물이 고일 때

당신의 눈물을 닦아주고

당신 곁에 있으리…’

당신 곁에 ‘탈 쓰고 있으리’는 어떨까? 파랑새는 결코 멀리 있지 않았다.

sys120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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