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미기자의 현장칼럼]마흔 즈음의 사람들

입력 2003-12-11 16:45수정 2009-10-10 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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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마흔살인 직장인 김복상씨가 군중이 분주히 움직이는 서울 명동 한복판에 섰다. 그의 단호한 표정에서 '불혹'에 접어든 40대의 의지를 읽어낼 수 있을 것만 같다. -이종승기자
《봄이 지나고 다시 봄 여름 지나도 또 여름, 빨리 어른이 됐으면 난 바랬지 어린 날엔,

나이 열아홉 그 봄은 세상은 내게 두려움, 흔들릴 때면 손잡아 줄 그 누군가 있었으면,

서른이 되고 싶었지 정말 날개 달고 날고 싶어, 이 힘겨운 하루하루를 어떻게 이겨 나갈까,

무섭기만 했었지, 가을 지나면 어느새 겨울 지나고 다시 가을,

날아만 가는 세월이 야속해 붙잡고 싶었지, 내 나이 마흔 살에는,

다시 서른이 된다면 정말 날개 달고 날고 싶어,

그 빛나는 젊음은 다시 올 수가 없다는 것을, 이제서야 알겠네,

우린 언제나 모든 걸 떠난 뒤에야 아는 걸까, 세월이 강 위로 띄워 보낸,

내 슬픈 사랑의 내 작은 종이배 하나, 내 슬픈 사랑의 내 작은 종이배 하나, 내 슬픈 사랑의 내 작은 종이배 하나》

요절한 가수 김광석은 노래 ‘서른 즈음에’에서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라고 했지만 가수 양희은은 ‘내 나이 마흔 살에는’이란 노래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다시 서른이 된다면 정말 날개 달고 날고 싶어. 그 빛나는 젊음은 다시 올 수 없다는 것을 이제서야 알겠네.”

연말이 주는 은연한 멜랑콜리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마흔 즈음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진 건.

우리 나이로 올해 마흔이었거나 한 달 후면 마흔이 될 1964, 1965년생들은 그 자신이 원하건 원하지 않건 ‘386세대’로 불려 왔으며, 진보적 가치관을 가진 ‘젊은 그들’로서의 셀프 이미지를 갖추고 있지 않던가.

불과 몇 명의 이야기를 듣고 옮기는 작업으로 마흔 즈음의 모습을 모두 보여줄 수는 없을 것이다. 단지 마흔 즈음의 이런저런 스펙트럼을 소개함으로써 삶의 위로와 자극을 전달하고 싶다.

:도전: 서울대 졸업. 대기업 과장. 서울 강남구 도곡동에 25평 아파트 소유. 내조 잘 해 주는 아내, 6세 딸과 단란한 가정.

살면서 어디 하나 아쉬울 것 없어 보이는, 서른아홉의 E씨(S기업 과장). 그는 평소 1주일에 세 번 수영할 정도로 자기 관리가 철저했지만 올해 회사 건강검진에서 심장 맥박이 비정상적으로 빠르다는 경고를 받았다.

막연한 불안감은 건강에 그치지 않는다. 갈수록 직장은 빠른 속도의 변화를 요구한다. 수많은 외국 경영대학원 출신과의 경쟁에서 인맥만을 내세워서는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30대에 직장 내 출세가 목표였다면, 마흔에는 내실을 기해야 한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대학원 진학도 꿈꾼다.

신체 변화처럼 부부관계도 하향 곡선을 그린다. 2년 전쯤 여자와 관련한 유혹을 겪었지만 비슷한 과정을 거친 직장 동료의 조언으로 극복했다.

친구들을 만나면 부모 건강 걱정과 고부 갈등이 주 화제이고, 일과 재테크 이야기가 뒤를 따른다. 질병 등 현실적 위험에 대비할 수 있는 종신보험에 가입했더니 든든해진다.

:여유: “20대 후반부터 30대까지 루프스(전신 홍반성 낭창)라는 자가면역성 질환을 겪었어요. 그래서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 자체에 감사해요.”

을지병원 의사 전재석씨는 6년 전 결혼했지만 치료약을 많이 쓴 탓에 정자수가 줄어 임신이 힘들었다. 그러나 시험관 아기를 시도한 끝에 두 달 전 소중한 딸을 낳았다. 한결같은 모습으로 웃고 화를 내는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했다.

“저의 서른은 이솝 우화의 ‘여우와 신 포도’ 같았어요. 높이 달려 있는 포도는 분명 실 것이라고, 확인도 안 해보고 체념했죠.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괴로웠거든요. 마흔 즈음에는 딸 수 없는 포도는 딸 수 없다고 인정하게 될 것 같아요. 이젠 다른 포도를 따러 가야겠어요.”

:인연: “살면서 가장 잘못한 결정이 결혼이고, 그나마 가장 잘한 결정이 이혼이었습니다. 1년 만에 잘못된 선택이라는 걸 알았지만, 아이도 낳고 9년 동안 결혼생활에 최선을 다해왔죠. 그래서 후회도 미련도 없습니다. 그저 운이 나빴다고 위로합니다.”

서울 모 대학 여성 교수는 서른을 그렇게 보내고 마흔을 앞두고 있다. 그러나 평생 혼자 살게 될 것 같지는 않다. 좋은 사람 만나서 새로 결혼해야겠다는 생각이다. 물론 급하게 결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는 평생의 동반자이자 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인연’이 중요하다고 여긴다.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갖는 게 가장 큰 행운이라는데, 그는 그런 행운을 얻었다. 돈을 좇지 않고 일을 좇았더니 돈도 따라왔다.

“사람들의 좋은 점만 보려고 노력합니다. 장점을 보고, 그 장점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존경해야 진정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어요. 골프와 등산모임에 자주 나가고, 수다 떨 친구들이나 저녁 이벤트를 만들 지인들이 있어 만족합니다.”

:가족: 직장생활 13년째인 샐러리맨 김모씨는 마흔이라는 나이를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고 했다. 내년이면 청년층 20, 30대에서 장년층인 40, 50대로 옮겨진다는 것이 “기가 막힐” 뿐이다.

운동권 서클 멤버 또는 시위 가담자가 아니었다 해도 김씨 또래는 조직을 위해 개인을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일종의 소명감이 있었다. 30대를 돌이켜보면 독서도 회사 업무와 관련된 범위 안에서 이뤄졌다.

지난달부터 하루 한 시간씩 시작한 운동은 그가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인생의 첫 활동이다. 상체 근육이 솟아오르는 게 느껴져 즐겁다.

“몸 만들어 바람피우려는 것 아니냐”며 눈을 흘기던 아내도 최근 중년 주부의 시한부 삶을 그린 드라마 ‘완전한 사랑’과 ‘로즈마리’ 영향 때문인지 슬그머니 운동을 시작했다.

마흔이 되는 내년 결혼 10주년을 맞아 김씨는 아내와 해외여행을 계획한다. 해외출장이 잦았던 김씨에 비해 아내는 괌으로의 신혼여행 이후 단 한번도 해외여행을 못했다.

:감성: 월간 잡지 ‘페이퍼’ 편집장 황경신씨에게 마흔을 앞둔 감상을 e메일로 답변해 줄 것을 부탁했다. 요즘 ‘스토리밴드’라는 창작 집단을 만들어 MBC ‘한뼘드라마’(황인뢰 연출)를 집필하고 있는 그녀의 감성을 가감 없이 전달하고 싶어서였다.

“저는 운이 좋은 편입니다. 나이에 구애받지 않는 일을 해 왔고, 지금 하고 있는 일과 앞으로 하려는 일도 나이와 별 상관없는 일들이기 때문이죠. 굳이 ‘마흔 즈음’에 계획한 것은 아닙니다만, 하고 싶은 일들은 항상 있습니다.

아마추어 록밴드를 시작한 지 아직 4년밖에 안 됐고, 영화 시나리오를 완성하지 못했고, 슈베르트의 즉흥곡 op.90은 2악장밖에 못 치고, 백남준 선생님도 인터뷰하지 못했고, 폴 매카트니 라이브 공연도 못 봤고, 비틀스 노래 가사 10개도 못 외우고, 마라톤 완주는커녕 하프도 뛰지 못했고, 황소자리와 큰곰자리도 구분하지 못하고….

가끔 친구들로부터 넌 자유롭게 살아서 좋겠다, 란 소릴 들으면 이렇게 말합니다. 하지만 넌 아이들이 있잖아. 아이들만이 줄 수 있는 기쁨이란 게 있잖아. 저는 결혼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

:단상: 김복상씨(AIG생명 세일즈리더)는 올해 마흔을 지냈다. 중소기업에서 시작해 몸값을 올려가며 3번 이직을 했던 김씨는 2000년부터 지금 직장에서 근무하며 스스로 만족할 만한 연봉을 받고 있다.

30대에 끊임없이 공부하고 노력했는데도 지난해 이맘때에는 막연히 초조하고 불안했다. 정작 40세가 되고 보니 자녀 생각이 커진다. 그들이 건강하고 밝게 자랄 수 있도록 사랑을 듬뿍 줘야겠다고 다짐한다.

샐러리맨 이모씨는 시골의 어머니가 가끔씩 말씀하시던 ‘단디단디’라는 사투리를 마흔에 접어들고서야 곱씹게 된다고 했다. 어원이 ‘단단히 단단히’로 추정되는 그 말에는 섣부른 과속에 대한 경계가 있다고, 세상사를 얕보는 마음을 걷어내는 신중한 태도가 숨어 있다고 이씨는 말한다.

“마흔 즈음에 비로소 인생을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김선미기자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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