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미의 현장칼럼]65세 대학생… ‘만학의 꿈’은 식지 않는다

  • 입력 2003년 11월 20일 16시 2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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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세의 나이로 40여년 만에 대학 교정에서 다시 공부하게 된 이화여대 간호학과 3학년 박영씨. 점심식사(아래)로 삼각김밤을 먹으며 다음 수업을 준비하고 있다.

65세의 나이로 40여년 만에 대학 교정에서 다시 공부하게 된 이화여대 간호학과 3학년 박영씨. 점심식사(아래)로 삼각김밤을 먹으며 다음 수업을 준비하고 있다.

여우비가 이화여대 교정을 적시던 가을날 이 학교 간호학과 3학년 박영씨를 만났다. 단아한 비둘기색 폴라 티셔츠에 연분홍색 우산을 받쳐 쓴 여학생의 두 팔에는 간호학 관련 서적이 한아름 안겨 있었다.

그는 다른 동급생보다 무려 40세 이상 나이가 많다. 65세.

이화여대가 재학생의 혼인을 금지했던 금혼 학칙을 폐지하자 9월 44년 만에 재입학했다.

57학번 그는 3학년 때 집안사정으로 학교를 쉬었다가 곧바로 결혼하면서 학업을 포기하고 말았다. 당시만 해도 여성의 대학 졸업장은 그다지 아쉽지 않은 시절이었다.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65세 정년 연장’ 논의가 무색할 만큼 젊고 고운 만학도의 대학 생활을 이틀 동안 동행했다.

“40여 년 전 내 무릎 높이밖에 오지 않았던 교정의 나무가 이젠 내 키의 두 배로 컸어요.” 빨갛게 단풍든 나무의 생장이 세월을 겸손하게 일깨워준다고 한다.

● 만학 풍경 하나―기숙사에서

박씨는 이화여대 기숙사에 산다. 룸메이트는 19세 신입생이다.

경주에 사는, 박씨보다 8세 많은 남편은 이화여대의 재입학 학생 모집 신문 공고를 보자마자 아내의 만학을 ‘종용’했다. 젊은 시절 아내와 자녀 5명을 국내에 남겨두고 홀로 일본 도쿄(東京)에서 10여 년간 유학한 남편은 대학을 마치지 못한 아내에게 늘 미안했다. 남편은 요즘 건강이 나빠져 아내의 도움이 필요한데도 아내가 마음 놓고 공부하기를 바란다. 박씨는 하루에 한두 번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는다.

박씨의 기숙사 방 침대 위에는 체크무늬 담요와 꽃무늬 이불이 정갈히 개어 있고 그 옆의 책상에는 손자가 줬다는 컴퓨터가 놓여 있다. 컴퓨터에 익숙하지 않은 박씨는 한글타자 프로그램으로 연습한다. 박씨의 학업을 도와주는 같은 과 학생이 있지만 매번 컴퓨터 작업을 부탁하기 미안해 숙제를 손으로 써서 제출할 때가 많다.

박씨는 이번 학기 모성건강, 아동건강, 정신건강, 성인간호학, 간호연구, 인간관계와 의사소통 등 3학점짜리 6과목을 신청해 공부한다.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이론 수업, 목요일과 금요일에는 이화여대병원에서 환자들을 직접 대면하는 실습 수업이다. 한 학기에 전공과목 18학점을 소화하기란 20대 학생에게도 만만한 일이 아니다.

●만학 풍경 둘―수업시간

12일 오전 9시반 이화여대 헬렌관 301호 간호연구 수업시간.

박씨 옆자리에 앉았더니 스프링 노트에 글씨가 빽빽이 적혀 있다. 보상(compensation), 투사(projection), 퇴행(repression)…. 전날 오전 2시까지 공부한 내용들이다. 자녀, 경제문제 모두 안정되고 시간도 있어 공부하기에 좋은 때이지만 정작 손으로 쓰고 또 써도 머릿속에 잘 들어가지 않는다. 시험 도중 공부한 것이 생각나지 않아 눈물이 핑 돌기도 했다.

그룹 스터디에서 그가 속한 조는 성(性)지식과 태도에 관한 설문조사를 한다. 20대 초반 이화여대생들에게 배포할 설문지를 만들고 먼저 조원들이 샘플로 설문에 응답해 자료분석방법을 익힌다.

박씨가 응답하는 것을 지켜봤다.

‘오랫동안 사귄 이성친구 간에 성관계는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전혀 그렇지 않다’, ‘결혼 전 성관계를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매우 그렇다’.

성에 대해 보수적인 것은 나이 탓일까. 다른 학생들의 응답을 엿보았더니 예상 밖에 더 보수적인 학생들도 여럿 된다. 간호학과에서는 성 관련 지식을 많이 배우기 때문에 더 조심스러워질 수 있다는 것이 20대 동급생의 설명이다.

학생들은 물론 이 수업 교수도 박씨에게 “선배님”이라는 호칭을 썼다. ‘선배님’은 기숙사 아침식사 시간에 제공된 찹쌀 송편을 싸와 쉬는 시간에 후배들에게 나눠줬다. 간호연구 수업이 끝난 낮 12시20분. 박씨는 구내매점에서 삼각김밥과 우유를 사 들고 10분 후 시작되는 다음 수업장소로 바삐 향했다.

수업시간에 만난 학생들은 박씨에 대해 “어려운 수업을 열심히 준비하는 선배님이 존경스럽다”고 입을 모았다.

● 추억의 앨범을 꺼내며

이날 오후 3시반 이화여대 안 카페테리아 ‘아름뜰’. 금혼조항 개정으로 인한 재입학 학생들이 마침 티타임을 겸한 친목 모임을 열었다.

올해 재입학한 학생은 20명으로 연령별로 70대 2명, 60대 5명, 50대 7명, 40대 2명, 30대 4명 등이다.

이화여대 재입학생 중 대다수는 신문에 보도되는 것을 꺼린다. 결혼 때문에 졸업을 불과 한두 학기 남기고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던 그들은 주변에서 이화여대를 졸업한 것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요즘 군대 가는 남자들이 여자들이 고무신 바꿔 신는 것을 염려하는 것처럼 우리 때에는 유학 떠나는 남자들이 여자와 미리 결혼을 해 두려 했어요.” (60대 후반 재입학생)

“졸업을 한 학기 남겨두고 서울대 졸업한 남자랑 몰래 결혼했는데 하객 중 같은 과 친구 아버지가 있어 결혼 사실이 들통 나고 말았죠.” (50대 후반 재입학생)

그들은 대학 때 체육시간에 배우던 댄스 음악을 함께 흥얼거렸다. 체육관 앞에 우거진 벚꽃이 유독 아름다웠다는 이야기, 지금은 아스팔트로 메워진 신촌 기차역 철로길 앞의 슈샤인 보이, 굴비 장수와 떡 장수 이야기도 나왔다.

이들의 재입학은 과거 결혼 후 6개월 이내에 제적당했다는 것을 입증해야 가능했는데, 시아버지 유품에서 또는 결혼 앨범에서 옛날 청첩장이 나와 천만다행이었다는 사연도 있었다.

● 감사와 봉사의 생활

생활이 넉넉한 50, 60대 또래들은 주로 골프 등 운동이나 취미생활을 하며 시간을 보내지만 이화여대 재입학생들은 대신 공부를 택했다.

“중간고사를 치른 날 집에 돌아와 구토를 했다”, “시험 공부를 하면서 혈압이 170까지 올라갔다”, “보따리 싸 들고 지방 집으로 내려가고 싶었다”는 만학 스트레스가 쏟아진다.

뒤늦게 대학 졸업장이 왜 필요할까.

“결혼 후 30년간 미국에 살다가 1995년 귀국했어요. 보육원과 교도소 등에서 무료로 영어를 가르치고 싶어요. 떳떳하게 봉사하려면 졸업장이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요.” (60대 초반 재입학생)

“바쁠수록 더 많이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 나이에는 친목 모임도 하나씩 정리할 때잖아요. 이제 60대는 노인도 아니에요.” (60대 후반 재입학생)

“20여 년간 사회복지시설과 양로원에서 물리치료를 했어요. 지금이라도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싶어요.” (박영씨)

13일 오후 이화여대동대문병원. 박씨가 간호학과 학생들과 함께 정신과 병동을 돌며 환자들과 대화를 나눈다. 블루마블 게임과 다이아몬드 게임도 한다.

“기분이 어떠세요? 저는요, 세상을 살아보니 이 나이에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고 오늘 또 선생님을 만나게 돼 참으로 기쁩니다. 빨리 완쾌해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박씨를 비롯한 이화여대 재입학 학생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그 옛날 대학 졸업을 안 시켜준 부모님과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뒤늦은 공부의 기쁨을 알게 해 주셔서. 요즘 하도 행복해 누워도 앉아도 웃음이 나옵니다.”

김선미기자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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