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이시영 '은빛 호각' 펴내…문단의 일화 이야기하듯 풀어

  • 입력 2003년 11월 20일 18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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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이시영씨(54·사진)가 최근 여덟 번째 시집 ‘은빛 호각’(창비)을 펴냈다.

그는 올 3월 “자유롭고 싶다”며 23년간 몸담았던 출판사 ‘창비’를 그만뒀다.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던 일상에서 벗어나니 ‘마음의 시간’이 생겼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이 한동안 천착했던 ‘단시(短詩)’보다 산문시가 많아진 것도 그 때문이다.

“혼자 있다보니 지나간 시간과 대화하고 싶은 생각이 솟아나요. 사유가 집중된 짧은 시보다는 삶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싶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시간 속에 걸쳐 있는 여러 사람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더군요.”

1980년대 말 어느 봄날 아침, 전날 마신 술로 허청대며 서울 종로구 낙원동 산보에 나선 시인. 목욕탕에서 나온 한 여인이 ‘탑골’ 안으로 쏙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당시 낙원동 술집 ‘탑골’은 문인들의 아지트였다)

‘한참을 망설이다 컴컴한 탑골 문을 열었더니… 안방 벽에 한 낯익은 윗도리가 걸려 활짝 웃고 있었다. 송기원의 것이었다.’(‘송기원의 윗도리’ 중)

원고 청탁이 들어오면 옛 시를 슬쩍 새 시처럼 내놓았던 말년의 미당 서정주와 이문구 한남철 등 문인들의 이야기, 계엄법 위반으로 종로경찰서에 구금됐던 신경림 구중서 조태일의 모습(‘1980년 여름 종로경찰서’), 89년 황석영 방북기를 계간 ‘창작과 비평’에 실었다가 시인 자신이 안기부에 연행됐을 때의 일화(‘짧은 이별의 순간’) 등 한국 현대문학사의 잘 알려지지 않은 장면들을 조용히 불러내고 있다.

이씨는 “건조하고 재미없는 현대의 일상에서 시 쓰기란 곧 ‘타인의 발견’이자 세상과 넓게 사귀는 방식”이라며 “문단사 자체보다는 거기에 깃든 삶의 낙천성, 의뭉스러움, 비애를 전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조이영기자 ly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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