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당나귀들'…무력한 인간 조롱하는 '말잔치'

  • 입력 2003년 5월 27일 17시 5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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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리 있는 언어의 연쇄가 비극적 현실을 희극으로 만들어 버리는 부조리극 ‘당나귀들’. 사진제공 국립극단
조리 있는 언어의 연쇄가 비극적 현실을 희극으로 만들어 버리는 부조리극 ‘당나귀들’. 사진제공 국립극단
적군이 국경을 넘어 수도를 향해 진격해 오고 왕은 이미 달아났다. 성에 남은 장군, 신하, 병사, 학자…. 이들은 이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말에 말의 꼬리를 물며 대책을 논의한다. 일단 시급한 것은 결단이다. 싸울 것인가 항복할 것인가. 오랜 논의 끝에 결론에 도달했다.

“우리가 결정을 못한다 해도 괜찮아. 우리의 적이 우리의 결정을 대신해 줄 테니까.”

인간은 언어를 통해 사고를 전개하지만 언어는 자체의 생명력을 가지고 언어를 재생산하면서 현실과 유리된 ‘언어적 사실’을 만들어낸다. 조리 있는 언어는 부조리한 ‘사실’을 낳고 비극적 상황을 희극적으로 만든다.

‘당나귀들’은 국립극단이 199번째 정기공연으로 무대에 올린 국립극단 최초의 부조리극이다. 이 작품에 거는 연극계의 기대는 각별하다. 국립극장이 2002년 창작공모에서 희곡부문 당선작으로 선정한 작품이고, 실험적 소설들을 연이어 발표하며 ‘문제적’ 작가로 주목을 받고 있는 작가 정영문의 첫 희곡이다. 여기에 한국 연극을 이끌어갈 차세대 연출가로 손꼽히는 김광보가 연출을 맡았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창작극을 만들어 보겠다는 국립극단의 의욕을 엿볼 수 있다.

정규수 김상호 등 외부의 역량 있는 배우들을 주요 배역으로 기용한 것도 긍정적으로 평가할 일이다. 전투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펄럭거리는 의상도 극의 주제를 잘 살렸다. 다만 돌고 도는 언어의 미로처럼 짜여진 무대에는 이 ‘언어의 연극’에 걸맞지 않는 과도한 장치들이 눈에 띈다.

김광보는 극적 연출의 ‘욕망’을 억누르며 작가의 언어를 그대로 살리려 애썼지만, 아쉬운 것은 배우들의 ‘언어’다. 이 작품에서 등장인물들의 언어는 서로 다른 의미를 뱉어내면서도 한 인물의 내면처럼 분화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불행은 한국연극계를 대표해야 할 국립극단에서조차 이 ‘언어극’을 감당할 만한 배우들을 충분히 가지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몇 안 되는 극적 장치마저 과감히 제거하고 ‘언어극’의 묘미를 최대한 살려보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30일까지. 평일 오후 7시반, 토 오후 4시 7시반, 일 오후 4시.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1만5000~2만원. 02-2274-3507

김형찬기자·철학박사 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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