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 흐르는 한자]<563>論 功 行 賞(논공행상)

  • 입력 2003년 4월 27일 17시 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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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 功 行 賞(논공행상)

賞-상줄 상 開-열 개 績-길삼 적

遺-남길 유 封-봉할 봉 藝-예도 예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다. 그래서 간단한 일조차 그 완성에는 알게 모르게 남의 도움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을 세운 것은 李成桂(이성계) 혼자만의 힘이 아니었다. 이른바 수많은 開國功臣(개국공신)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래서 그는 都評議使司(도평의사사)라는 최고 의결기구를 두어 그들을 모셨다. 뿐만 아니라 鄭道傳(정도전)이나 趙浚(조준) 등에게는 각별히 예우해 주었다. 이른 바 論功行賞이 그것으로 功績(공적)의 많고 적음에 따라 그에 걸맞는 대우를 해주는 것을 말한다.

중국의 경우, 대표적인 論功行賞을 들자면 周(주)나라를 꼽을 수 있다. 아버지 文王(문왕)의 遺業(유업)을 계승하여 武王(무왕)이 세운 나라였지만 여기에는 많은 공신들의 도움이 있었다. 낚시꾼 출신이었던 姜太公(강태공)은 文王 때부터 활약했던 제일의 開國功臣으로 武王은 그를 스승으로 극진히 예우했으며 후에 齊(제)에 봉했다. 그 뿐이 아니었다. 功臣과 함께 왕족을 제후국에 봉함으로써 周나라는 封建制度(봉건제도)를 실시하게 된다.

도움을 준 이상 그 대가를 바라는 것은 人之常情(인지상정)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응분의 보상이 없다면 실망, 분노가 생길 수도 있다. 또 功績의 평가가 합당하지 않아도 불만은 있을 수 있다. 전자의 경우는 項羽(항우)를 들 수 있다. 탐욕스럽고 고집이 셌던 그는 秦(진)을 멸망시킨 후 論功行賞이 공평하지 못했다. 총 18王을 봉했지만 원칙없이 자의적으로 행한 결과 불만을 품지 않은 자가 없었다. 그중 가장 불만이 많았던 자가 劉邦(유방)이었다. 결국 項羽를 타도하고 漢(한)을 세우게 되니 論功行賞의 잘못으로 왕조가 바뀔 수 있음을 보여준 경우라 하겠다.

후자의 경우는 唐太宗(당태종·李世民)을 들 수 있다. 본디 아버지 李淵(이연·唐 高祖)을 도와 隋(수)나라를 무너뜨리고 唐나라를 세우는데 가장 혁혁한 공을 세운 이는 그였다. 사실 혁명을 부추긴 것부터 그의 제안이었을 정도다. 하지만 그는 둘째 아들이었다. 아버지 高祖는 그의 공로와 뛰어난 武藝(무예)를 인정은 하면서도 長子繼承(장자계승)의 원칙에 따라 왕위를 큰아들 李建成(이건성)에게 물려주고자 했다. 극도의 불만을 느낀 李世民은 마침내 변을 일으켜(玄武門의 變) 형을 죽이고 아버지를 협박하여 왕위를 물려받았다. 論功行賞은 공정 합당해야 함을 일깨워준다.

鄭 錫 元 한양대 안산캠퍼스 교수·중국문화 sw478@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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