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순덕]세헤라자드의 눈물

  • 동아일보
  • 입력 2003년 4월 11일 18시 36분


이런 무식한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다. 나는 세계 4대 문명발상지 메소포타미아가 지금의 이라크인 걸 최근에야 알았다. 고교 때 교과서에 실렸던 메소포타미아의 지도까지 기억하지만 어디에도 그게 지금의 이라크라는 표시는 없었다. 책방에서 뒤져본 일부 교과서 참고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라크가 그렇게 대단한 나라였다니! 그걸 모르고 메소포타미아와 관련 있는 건 함무라비 법전이다 식으로 외워 시험을 봤던 나는 죽은 교육을 받은 셈이었다.
▼이라크에 흐른 傲慢의 강 ▼
알고 보면 부드럽지 않은 사람 없고, 불쌍하지 않은 사연 없는 법이다. 문제는 알고 싶으냐 아니냐의 차이일 뿐. 그래서 적국의 국민이라도 일단 개인적으로 알게 되면 내 나라 이웃보다 친해지는 게 가능한 거다.
나와 전혀 상관없는 곳이라고 생각했던 이라크가 ‘아라비안나이트’의 무대였다는 걸 알게되자 그 나라가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껴안고 폭격을 피하는 이라크 여인의 얼굴도 ‘재미없으면 죽는다’는 공포 속에 1001일 밤 동안 왕에게 이야기를 들려 줘야했던 ‘아라비안나이트’속 세헤라자드처럼 느껴졌다.
그 찬란한 문명의 요람이, “우리는 인류에게 모든 것을 주었다”고 할 만큼 문자부터 농업 법령 제국주의까지 발명해낸 ‘자존심의 나라’가 왜 오늘의 굴욕에 이르렀는지 궁금했다. 그것도 모든 것을 다 가진 미국에 의해서.
문명의 몰락은 외부의 침공 아닌 내부 요인에서 비롯된다고 역사가들은 말하고 있다. 메소포타미아에 흐른 강은 티그리스만이 아니었다. ‘휴브리스(hubris·오만)의 강’도 같이 흘렀다. 그리스 로마부터 대영제국에 이르기까지 문명의 쇠퇴 원인으로 한결같이 지적돼온 오만과 그에 따른 부패는 이슬람에도,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려 했던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의 심장에서도 범람했다.
아랍에미리트의 역사학자 파트마 알 사예흐 박사는 그 나라 영자지 걸프뉴스에 쓴 글에서 “이슬람의 우월성에 대한 오만이 시대 변화와 바깥 세상의 발전을 외면한 채 스스로 문을 닫아걸게 만들었다”고 했다.
다양한 문화를 수용하고 이견을 관용한 덕에 화려하게 꽃 피웠던 이슬람문명이 그 절정에 이르는 순간, 영웅들이 한결같이 빠져드는 오만의 불치병에 걸려 파멸로 치달았다는 지적이다. 이라크 국민의 95%가 믿고 있는 이슬람교, 그 중에서도 자신들만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는 이슬람근본주의는 이 같은 오만의 젖줄이었다.
비극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더 큰 비극은 이제 울트라 슈퍼파워의 자리에 서서 세계 재편을 꾀하고 있는 미국이 과거의 이슬람문명을 닮아간다는 데 있다.
9·11 세계무역센터 테러 참사 이후 봇물이 터진 미국제 오만의 강은 이 편에 서면 선이요, 안 서면 악이라는 흑백의 이분법으로 세계를 갈라놓았다. 다양성과 자유를 존중하던 미국이 9·11뒤엔 다르면 차별하고, 안보를 위해선 자유도 유보하는 편협한 나라로 변했다. 신은 미국 편이라는 종교적 극단주의는 성경공부로 하루를 시작하는 조지 W 부시 대통령 안에도 존재한다.
이처럼 달라진 미국의 모습이 세계무역센터를 무너뜨린 알카에다 조직과 흡사하다는 건 웃기는 아이러니다. 자기들만이 정당하다고 믿는 것이나 신의 이름으로 악을 응징한다는 것이나.
▼나와 다른 남을 관용하기 ▼
오만과 극단주의는 이슬람세계와 미국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노파심이라 믿고 싶지만 노무현 대통령에게서도 그 싹이 보이기 시작한다.
대통령이 되기 전 정신적 지주였다는 송기인 신부가 성당에 나올 것을 권하자 “착하게 살고 있는데 뭐 하러 나가느냐”고 대답했다는 말이 있다. 이미 착하게 산다는 노무현교식 믿음, 내 측근은 문제가 없다는 판단, 쓴소리를 악의적 비판으로 치부하는 완강함은 한때 역사의 정점에 올라서도 결국은 내리막길을 걷게 만드는 오만과 극단성에 맞닿아 있다.
‘아라비안나이트’엔 오늘날 햄버거를 제치고 세계에서 제일 인기있는 음식이 됐다는 피자의 토핑처럼 다양한 문화와 인간이 어우러져 있다. 세헤라자드는 그 지혜와 포용력으로 왕의 마음을 녹여가며 아들 셋을 낳아 목숨을 구했다. 중요한 건 나와 다른 남을 껴안는 관용이다. 새 이라크와 미국과 우리 대통령도 이제는 오만과 극단을 버리고 옥동자를 낳았으면 좋겠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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