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의날 특집/동아신춘문예 출신 문인 좌담]신문의 역할

  • 입력 2003년 4월 6일 19시 5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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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매체시대를 맞아 신문에겐 어떤 역할을 기대할 수 있을까.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김주환 남진우 이문열 조경란씨(왼쪽부터)가 좌담에 앞서 막 나온 초판신문의 문화면을 훑어보고 있다. -변영욱기자
다매체시대를 맞아 신문에겐 어떤 역할을 기대할 수 있을까.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김주환 남진우 이문열 조경란씨(왼쪽부터)가 좌담에 앞서 막 나온 초판신문의 문화면을 훑어보고 있다. -변영욱기자
《‘최초의 인터넷 대통령 로그온’. 지난해 대선이 끝난 뒤 한 외국 신문은 이런 제목을 곁들여 한국의 정세를 소개했다. 인터넷 강국으로 일컬어지는 한국에서 온라인 문화는 기존의 주류를 대치했다는 자신감을 내비칠 정도로 비약적인 성장을 거뒀다. 신문과 종이로 상징되는 기존의 문화는 이제 역할을 마감하는 것일까.

이미지와 ‘클릭’의 문화는 문자와 숙고의 문화를 문제없이 대치할 수 있을까. 다매체시대를 맞아 신문에겐 어떤 역할을 기대할 수 있을까.

7일 신문의 날을 맞아 ‘문자의 제전’인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이문열(79년·중편소설) 남진우(81년·시) 조경란(96년·단편소설) 등 세 문인이 ‘다매체 시대와 신문의 역할’에 대해 거침없고도 솔직한 얘기를 나눴다. 사회 역시 동아일보

신춘문예 출신의 김주환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교수(98년·미술평론)가 맡았다.》

사회=신문은 우리 사회의 문화형성기능을 주도해온 가장 중요한 매체였습니다만, 그런 위상은 최근 커다란 도전에 직면한 것 같습니다. 다매체 시대에 신문의 역할은 무엇일까, 문화계에서는 어떤 역할을 신문에 기대하고 있을까, 이런 주제를 논의하는 장으로 이 자리가 마련됐습니다.

이문열=최근 시대 변화의 양상은 10대가 주도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예전에 우리 사회에서 의식화 내지 정치화라고 하면 대학에 입학할 나이인 20세 이후의 일이었죠. 최근의 몇 가지 현상을 보면 이제는 10대의 나이에 의식화, 정치화를 겪는 것 같아요. 이런 10대의 의식화는 주로 인터넷과 방송 매체를 통해 일어나죠. 신문은 여기에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신문은 무엇을 해야 할까, 이를 고민하는 일도 중요할 듯합니다.

남진우=최근 문화는 분명 하향 평준화 내지 파편화의 징후를 겪고 있으며 이는 어느 정도 정치권력의 재편과 맞물려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구체적으로 어느 쪽으로 가고 있는지는 잘잡히지 않는데, 방송 및 인터넷 대(對) 신문, 이런 구도로 국면을 몰고 가는 것은 특정 세력에 의해 의도적으로 조장되고 있는 느낌이 듭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큰 문제 중 하나는 악대(樂隊)차가 지나갈 때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Bandwagon Effect)처럼 시끌벅적한 것이 하나의 세력이 되고 결국 그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들어 거대화된다는 점입니다. 방송이나 인터넷이 이런 측면과 결합한다면 문화적으로 결코 이롭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문열=내 경험에 따르면 오늘날의 문화는 예전보다 훨씬 정치화된 것 같습니다. 요즘 대학생들에게 어떤 작가에 대한 생각을 물어보면 작가에 대해 잘 알고 있는데 그 작가의 책은 읽지 않았다고 대답한답니다. 정치적 힘, 사회적 이미지로만 작가를 파악할 뿐, 작품으로 파악하지 않는 거죠. 근대사에서 지금까지 사회운동의 전위로 10대가 나설 때 불행한 결과를 낳았던 전례가 많이 있습니다. 중국 문화대혁명기의 홍위병도 10대가 주력이었고, 실제로 아프간의 탈레반도 10대 위주였다고 알고 있습니다.

사회=대선을 전후해 세대간 차이를 강조하는 이야기가 많았지만, 오늘날 특히 대중문화 영화 광고 모바일 등 새로운 기술은 10대가 점령하고 있습니다. 요즘 모바일 광고를 보면 이해하기 힘든 것이 많죠? 이해를 못하면 바로 그 광고의 타깃이 아니라는 뜻이랍니다. 이런 새로운 문화의 세례를 받은 10대들은 신문과 많이 떨어져 있습니다. 대학생들도 종이 신문을 잘 보지 않습니다. 기성세대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신문이 즉시성 신속성으로 방송이나 인터넷과 경쟁할 수는 없습니다. 신문만이 가진 남다른 장점을 살려나가는 것이 중요한데, 그런 점에서 ‘성찰과 반성’을 지면에서 강화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앞으로 각 신문의 이념 및 세대적 분화가 점차 강해질 것 같습니다. 문화의 흐름이 ‘대중화’라는 한 가지 방향으로 고착되는 것을 막기 위해 신문이 제 역할을 해야 합니다.

이=문화의 중요한 기능이 성찰과 반성인데, 인터넷 매체나 비디오 매체에는 아예 그런 기능 자체가 없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종종 듭니다. TV 화면을 보면서는 성찰이나 반성이 되질 않습니다. 인터넷의 쌍방향성이란 것도 생산과 종합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각적이며 즉흥적인데 그치는 것이 현실입니다. 수준 이하의 비방은 논외로 치더라도….

남=익명성이라는 문제가 해소되지 않으면 어쩔 수 없지 않을까요.

이=자기를 드러낸다 하더라도 매체 수단 자체에 한계가 있다고 봅니다. TV 토론을 예로 들더라도, 얼굴을 드러내지만 심도 깊은 수준을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이=좋게 생각하면 구텐베르크가 처음 활자만들어 책을 찍어 냈을 때, 그 이전의 책에 익숙하고 가치를 부여하던 사람들은, 싸구려 종이에 똑같은 내용을 찍어서 나눠준다는 사실에 대해 대단히 공포스러워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대량생산된 책이 우리 문화 전부를 수용하게 됐죠. TV나 인터넷이 다음 시대에 더욱 중요한 문화적 수단이 되기 때문에 진지한 문화도 결국 이들을 통해 수용되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까지 치뤄야할 시행착오 때문에 또 아득해지기도 하는군요.

사회=문학이 꼭 종이로 만든 책에 기반할 필요는 없다고 누군가 말하더군요. ‘그러면 인쇄매체 아닌 문학은 무엇인가’라고 물었더니 영화라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극단적인 사람들은 ‘법전도 동영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 아닌가’라고 말합니다. 새로운 매체는 나올 때마다 일종의 두려움을 조장합니다.

조=저는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인터넷이 처음 등장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우려를 표시했습니다. 특히 문학은 사망할 것이라고들 이야기하기도 했죠. 결과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는 서로의 영역이 구분, 정리된다는 느낌입니다.

사회=전자책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들을 갖고 계십니까.

조=우리가 글자와 친숙해지는 것은 전자책이나 PDA를 통해서는 아닌 것 같아요. 예를 들어 TV에 시인이 나와 시를 낭송할 때 자막이 함께 올라갑니다. 영상과 음성만 나올 때 시각적으로 충족되지 않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활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자막의 의미는 종이책의 의미이자 상징으로 느껴졌습니다.

남=전자책이 종이책의 물질적 감촉을 얼마나 만족시켜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사회=전기로 종이 위에 글자를 바꾸는 종이 모니터가 개발되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이 종이책이기 때문이죠. 주변을 보면 인터넷 신문을 많이 보는 사람이 종이 신문도 많이 봅니다.

이=나는 다른 경험이 있습니다. 주변에 글 공부하는 청년들이 많은데, 이들에게 소설을 종이로 프린트해서 읽어보라고 주었습니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나도 다 보지를 못하더군요. 마침 출판사에 이메일로 작품을 넘겨주기로 돼 있어, 파일 상태로 줬더니 다들 모니터로 읽어보더군요. 11명 중에 모니터로 다 읽은 사람은 8명이었습니다.

조=저나 주변 사람들은 모니터로 보다가도 마지막에는 프린팅을 한 뒤에 보는데….

이=지금 습작하는 젊은이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회=지금 젊은이들은 클릭할 수 없는 텍스트가 답답하다고 하죠.

남=그래도 아침에 현관에 떨어진 신문을 들고 거실에 들고가 읽는 맛은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나중엔 소수의 신문애호가 그룹이 생길지도 모르겠네요. (웃음)

조=클릭의 의미는 ‘참여’의 의미입니다. 젊은 세대는 이를 통해 문화의 프로슈머(소비+생산자) 역할을 느낍니다. 종이책이나 신문은 이런 참여가 불가능하죠. 예술품을 만드는 작가와 독자가 서로 소통해서 새로운 창작품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클릭의 문화는 긍정적입니다. 신문도 앞으로 이런 부분을 살려야 합니다. 독자가 참여하고 소통할 수 있는 기능을 적극적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사회=종이신문은 예전과 같은 기능을 계속 유지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신문이 가진 비판적 저널리즘의 기능은 인터넷 매체 등 다른 매체들도 함께 가지고 가지 않을까요. 문화와 신문의 바람직한 관계는 무엇일까요. 비평의 기능을 심화하는 것일까요.

이=신문은 문화의 생산자와 소비자를 원활하게 연결해주는 기능을 해왔습니다. 아주 중요한 매개기능이죠. 문화의 고급과 저급을 선별하는 기능도 했구요. 지금은 그 기능이 약화되고 있는 것 같아 유감입니다.

남=요즘은 신문 문화면에서 비평 기능이 상당히 약화됐습니다. 내가 10대 때만해도 신문 문화면에 빠지지 않는 것이 시 월평이었는데, 슬그머니 없어져버렸어요. 문학과 관련된 기사도 점차 말랑말랑한 쪽으로 바뀌는 느낌이 듭니다. 연재소설도 신문에서 자취를 감추어가는 것 같습니다. 서양에서는 19세기 신문의 융성과 소설의 발전이 맞물려서 진행됐고, 우리나라에서는 1970년대에 이런 관계가 가장 두드러졌습니다. 90년대부터 신문에서 연재소설이 퇴조했는데, 아쉬운 부분입니다.

조=최근 자료를 찾다가 우연히 ‘신문연재소설연구’ ‘한국신문소설사’ ‘한국개화기 신문연재소설연구’ 등 막대한 분량의 신문문학 연구서를 보고 놀랐습니다. 인쇄매체가 여러 독자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것인지 반드시 생각해야 합니다.

남=신문이 신속성과 정확성을 접어둘 수 없는 것이지만, 문화에 있어서는 신속성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신문과 문화가 만나는 것은 가치판단을 가지고 만나는 것일텐데, 가치는 미학적 판별의 문제가 됩니다. 비평적 기능의 강화는 분명 필요한 일입니다.

조=‘글쓰기라는 것은 소수가 하는 것이며 진짜 독자도 소수다’라는 내용의 글을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독자가 없으면 작가도, 예술, 문화도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사르트르 역시, 독자가 읽었을 때에만 작가와 저널리즘이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작품, 또는 문화는 독자가 창조했을 때 완성된다는 자각같은 것들이 독자를 존재하게 하는 이유라는 생각입니다. 문화나 저널리즘이 가장 고민해야하는 것은 무엇보다 ‘독자’가 아닐까요.

사회=그 ‘독자’의 요구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있을 때 신문과 뉴미디어는 가장 바람직한 보완관계 속에 다음 세대의 문화현상을 발전적인 형태로 심화 지원하거나 담아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여러 가지 현명한 지적과 바람직한 제안들에 감사드립니다.

정리=조이영기자 ly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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