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중편소설]김언수/프라이데이와 결별하다

  • 입력 2002년 12월 31일 15시 48분


그림 서용선
그림 서용선
▼줄거리▼

시월 이일 아침. 그는 프라이데이와 결별한다.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그는 서랍을 열어 업무용 파일과 사무 용품들을 쓰레기통에 버린다. 동료들이 다가와 난데없이 책상 정리는 왜 하느냐고 묻는다. 그는 프라이데이와 결별을 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회사 동료들은 프라이데이와 결별했다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사실은 그가 말하는 프라이데이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말이 더 옳다. 입사 동기인 K가 다가와 프라이데이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오전에 있을 ‘공격적 마케팅에 관한 전략 회의’에는 상무님이 참석하니 늦지 말라고 말한다.

시월 이일 아침. 그는 프라이데이와 결별했고, 맞은 편 17층 건물에서는 유리창을 닦던 늙은 청소부가 지상으로 떨어졌으며, 신문 1면에는 ‘연예인 B양이 국회의원 J와 섹스는 두 번밖에 하지 않았으며 더구나 항문 섹스를 해줬다는 기사는 터무니없는 낭설이라고 부인하는’ 기사가 실린다. 그리고 그는 프라이데이와 결별을 했으므로 회사를 나온다. 물론 프라이데이와 결별했으므로 상무님이 참석하는 ‘공격적 마케팅에 관한 전략 회의’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는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하고 생각한다. 하지만 막상 갈 곳이 없었다. 그는 무작정 거리를 걷기 시작한다. 그는 상품과 광고와 유통과 친절과 서비스 정신으로 가득 차 있는 종로의 거리를 계속해서 걸어다닌다. 그리고 문득 그토록 회사와 도시를 떠나고 싶어했던 자신이 가짜 웃음과 가짜 친절로 가득 차 있는 회사와 도시 말고는 사실 아무 곳에도 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집으로 돌아온다. 그는 이상한 병에 걸려 앓아 눕는다. 그는 며칠인지 알 수 없는 긴 시간동안 계속해서 잠을 잔다. 그리고 자신이 병에 걸린 것은 회사에서 만난 그토록 단정하고 친절한 사람들이 어쩌면 입 속에 나쁜 병균을 몰래 숨겨두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느날 그는 라면을 사기 위해 거리로 나왔다가 난데없이 경찰에게 끌려간다. 그는 단지 편의점의 위치를 물으려 했을 뿐인데 여자는 그가 자신을 성추행 하려는 것으로 오해했기 때문이다. 경찰은 그에게 왜 여자를 강제 추행했느냐고 묻는다. 그는 절대로 그런 일은 없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경찰은 그의 말을 전혀 믿으려 하지 않는다.

여자의 오빠가 다가와서 그를 죽여버리겠다고 소리를 지른다. 그는 계속 그런 일이 없었다고 말하고 경찰은 그의 말을 믿지 않는다. 경찰과 그는 밤새도록 똑같은 말로 실랑이를 벌인다. 그러다 신원 조회에서 그가 대기업에 근무하는 회사원이라는 것이 밝혀지자 그제서야 경찰이 그의 말을 조금씩 믿기 시작한다. 그는 새벽이 다 되어서야 파출소에서 풀려난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서 방안에 숨게 된다. 그는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주인집 할머니가 방세를 내라고 자꾸 찾아온다. 할머니는 왜 젊은 놈이 일을 하지 않고 빈둥거리냐고 화를 낸다. 그는 프라이데이와 결별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할머니는 프라이데이가 그렇게 무서운 놈이냐고 묻는다. 그는 프라이데이는 친절하지만 입 속에는 치약 광고에 나오는 창을 든 나쁜 병균들을 잔뜩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할머니가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냐고 화를 내고 간다.

시간이 지날수록 세상과 연결되어 있던 수많은 것들이 하나둘씩 끊어지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유선방송 케이블이, 그 다음엔 수도가, 그 다음엔 가스와 전화가 끊어진다. L카드 회사에서는 곧 신용불량으로 등록될 것이니 알아서 하라는 전화가 오고, 빌려간 돈을 갚아주겠다던 형에게서는 전화가 오지 않는다. 그리고 할머니는 계속해서 방세를 내라는 말만 되풀이한다.

▼당선소감▼

김언수

당선 소식을 접하고 제일 먼저 조해일 선생님과 기쁨을 나누었다.

소설을 들고 그 높은 연구실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지 5년 만이던가. 처음 3년 동안 열두 편의 소설을 갖다드렸다. 빨간 펜으로 꼼꼼하게 교정이 된 내 소설을 돌려주시면서 선생은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우리는 녹차나 재스민차를 마시면서 이 나라 정치의 한심한 작태에 대해 이야기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이 뒷전에 물러나 있는 이 땅의 우스꽝스러운 현실에 대해 이야기했다. 때로는 가까운 지인들의 연애 행각에 대해 악의 없는 뒷이야기를 하며 주책없이 킥킥대기도 했었다.

하지만 소설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선생은 말하지 않았고 나는 차마 물어볼 수 없었다. 교수 회관 돌계단에 앉아 오문과 비문마다 빠짐없이 밑줄 그어져 있는 내 소설을 들여다보며 나는 선생의 완강한 침묵에 대해 오래도록 생각하곤 했었다. 어쩌면 선생은 맞춤법 교정자로 스스로를 낮추면서 소설은 누군가로부터 들어 배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부로부터 끝없이 훈육되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제자에게 가르치고 싶었던 것인가. 그렇다면 선생의 전략은 성공한 셈이다. 나를 가르친 것은 그곳으로 오르는 무수한 돌계단과 “이 깡통아! 고통이 부족하니까 소설이 그 모양이지.” 하고 나를 놀려대던 아카시아 나무였으니까.

나는 글쓰기에 있어 재능과 천재성이라는 말을 믿지 않는다.

그것은 환상이다. 그것은 작가란 존재가 다른 사람들보다 특별히 높은 곳에 있다고 믿는 선민의식의 슬픈 유물이다. 문학이 인간의 이해에 그 뜻을 담고 있다면, 인간을 이해하고 인간을 사랑함에 있어서 재능이라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인간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데 필요한 것은 겸손과 성실함이지 재능과 천재성이 아니다.

우리는 술자리에서나 호기롭게 힘을 발휘하는, 이 어쭙잖은 재능과 천재성이라는 말로 자신의 게으름을 속이고, 방종과 타락에 면죄를 받았으며, 스스로를 재능 있다고 믿는 일군의 무리 속에 들어앉아 킬킬대며 세상의 많은 정직함을 비웃고 상처 주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나는 재능과 천재성이라는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내가 믿는 것은 오로지 체력뿐이다. 지치지 않고 계속 걸어가는 것. 겸손하게 사람에게로 다가가고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 그래서 책상에 앉아 스탠드에 우두커니 불을 켜고 자신이 읽어낸 인간의 작은 부분에 대해 매일 밤마다 조금씩 조금씩 글을 쓰는 것이다.

감사해야할 사람들의 이름을 일일이 호명할 수 없어 유감이다. 그 이름들은 너무나 많고 그 사연들은 너무나 길다. 하지만 내가 가진 유일한 재산이 그대들이 내게 준 사랑이라는 것을, 그래서 내가 얼마나 그 이름들을 낱낱이 사랑하는지 그대들은 알 것이라 믿는다. 그 낱낱한 사랑을 죽는 날까지 갚아갈 것이다.

△1972년 부산 출생 △1999년 경희대 국문과 졸업 △현재 경희대 대학원 국문과 재학

▼심사평▼

금년도 중편소설 부문의 응모작들은 예년의 수준을 크게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작품의 소재 자체도 자연스러움을 잃고 있는 경우가 많고, 인물의 성격도 과장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서사구조의 불균형이나 주제의식의 과잉 상태가 여기서 비롯되고 있다. 신인다운 패기와 실험성은 자신의 이야기를 새롭게 해석해 내는 힘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소재의 신기성(新奇性)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예심을 통과한 작품 가운데 본심에서 주목을 받았던 작품들은 ‘프라이데이와 결별하다’(김언수), ‘전화번호부’(한성탁), ‘전사들의 행진곡’(최화성), ‘이야기 속의 이야기’(오정미) 등이었다.

이 가운데 중편소설의 소설적 주제와 확대라는 점에서 ‘전화번호부’, ‘전사들의 행진곡’을 먼저 지목하였다. ‘전사들의 행진곡’은 운동권 출신의 젊은이와 고엽제 피해자가 등장하는데 의도적인 인물의 설정 자체가 설득력을 약화시키고 있다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전화번호부’는 헌 전화번호부를 소설적 장치로 활용한 점이 흥미롭지만 논픽션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는 점이 문제로 지적되었다.

서사적 기법과 그 새로운 해석이라는 점에서 ‘프라이데이와 결별하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를 골랐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는 소설적 묘사와 그 감각성은 인정되지만 서사적 균형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는 약점이 너무 크다.

‘프라이데이와 결별하다’는 반복되는 일상의 체험 속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주인공의 내면의식을 끈질기게 추구하고 있는 작품이다. 삽화적이긴 하지만 삶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처리하고 있는 늙은 유리창 청소부의 죽음은 그 인상이 매우 강렬하다. 주인공이 스스로 모든 외적 관계로부터 자신을 차단시키면서 자기 존재의 영역을 확인하고자 하는 노력은 정체성을 잃고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과 대비된다. 특히 삶의 범위를 좁혀가면서 주인공이 결국 자기 자신을 그 좁혀진 공간으로부터 증발시키는 소설적 결말도 인상적이다.

당선작을 낸 김언수씨에게는 문단의 새로운 이름으로 오래 기록될 것을 당부드리며 다시한번 축하의 박수를 보낸다. 응모자 여러분들에게도 또 다른 도전을 위해 노력할 것을 권한다.

이문열 소설가

권영민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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